한·일 국교 재개 이후 열여덟의 일본 대사가 한국에 왔다. 더러는 돌아가 한국 비난을 일삼는 이도 있지만 양국 우호에 애쓴 대사가 훨씬 많다. 두 번째 대사를 지낸 가나야마 마사히데는 "시신을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19년 전 작고 후 유족들이 유골 일부를 경기도 파주의 한 묘원에 묻었다. 이따금 지인들이 모여 그를 기린다. 한·일 우호의 상징 같은 곳이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전 주필을 6년 전 서울에서 처음 만났다. 한국 문화계의 대모(代母)로 이름났던 고(故) 전옥숙 여사가 소개했다. "일본에 와카미야만 한 사람이 없다"는 전 여사의 괄괄한 목소리가 생생하다. 몇 년 뒤 정년 퇴임한 그가 서강대 한국어교육원에 입학했다는 소식에 놀랐다. 자식뻘 되는 학생들에게 "오빠" 소리 들으면서 반장까지 맡았다. 그 역시 언젠가 이 땅에 뼈를 묻을 일본인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와카미야는 11년 전 '독도 양보'를 시사하는 칼럼으로 우리에게 환영받았다. 반대로 일본에선 살벌한 협박에 시달렸다. 양국 사이에 마찰이 일 때마다 상대를 이해하자는 쪽에 선 언론인이었다. 한국을 위해서였을까. 그보다는 역사의 짐을 지고 동북아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일본을 위해 그랬을 것이다. 작년 말 한국 검찰이 위안부 기술 문제로 박유하 교수를 기소했을 땐 미·일 지식인의 항의 성명을 주도했다. 이번엔 한국의 양식(良識)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일본엔 한국 전문가가 많다. 종종 그들의 끈질긴 취재와 방대한 지식에 놀란다. 하지만 애정이 사라지면 지식은 쉽게 흉기로 변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양국 우호를 함께 걱정하던 사람이 갈고닦은 지식을 돌연 혐한(嫌韓) 상품으로 팔아먹는 현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한·일 관계가 나빴던 십수 년 동안 인내하면서 상대에 대한 애정과 예의, 겸손을 잃지 않은 일본인은 몇 안 된다. 와카미야는 그런 드문 일본인이었다.

▶엊그제 그가 동북아 협력을 모색하는 심포지엄에 참석하러 간 베이징에서 급서(急逝)했다. 일주일 전 그는 서울에서도 같은 목적의 심포지엄에 나갔었다. 그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와카미야만 한 일본인이 없다'는 전옥숙 여사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3년 전 한국어교육원 졸업 앨범에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사진을 남겼다. '덕분에 뇌도, 마음도 젊어졌습니다!'라는 소감도 적었다. 양국 관계가 그만큼 어려웠던 것일까. 68세, 너무 빠르다. 두 나라 사이에 그의 역할을 대신할 일본인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