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80년대 연세대 사학과 김용섭 교수는 역사학도들의 우상이었다. 그가 내놓은 '조선 후기 농업사 연구' 연작은 광복 후 국사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작 중 하나일 것이다. 대학 시절 그의 연구에서 '자본주의 맹아(萌芽)' '경영형 부농' 같은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흥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의 연구는 조선 후기 사회가 외세 작용이 없었으면 충분히 혼자 힘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으로 체계화됐다.
▶1960년대 국사학계 최대 과제는 식민사관(史觀) 극복이었다. 식민사관의 해독(害毒)은 헤아릴 수 없지만 특히 고약한 것이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이었다. 한민족은 주체적으로 역사를 이끌 힘을 갖추지 못했고, 따라서 외세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실증 자료를 통해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깨부쉈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엽전 의식'에 젖어있을 때였다.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인들이 패배 의식을 떨치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정신적 힘이기도 했다.
▶김용섭 교수는 회고록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에서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에 파고든 계기를 "6·25전쟁이 일어나는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들어서"라고 했다. 그가 본 6·25는 "한말 일제하부터 이어 온 계급적 대립이 확대된 내전"이었다. 그는 "이 같은 문제를 역사적으로 살피기 위해 동학농민전쟁을 그 운동자들의 주체적 입장에서 파악하려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내재적 발전론'이 80년대 이후 민중사학과 연관되는 맥락을 엿보게 하는 구절이다.
▶좌우를 넘어 한국사 연구에서 절대적 권위를 누려온 '내재적 발전론'에 도전이 시작됐다. 엊그제 한국역사연구회 발표회에서 최종석 동덕여대 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을 토대로 한 연구의 한계와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한국사 학계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한국역사연구회는 김용섭 교수 제자가 여럿 포진해 있고 "민중의 의지와 세계관에 들어맞는 역사학 추구"를 내세운 단체라는 점에서 이번 문제 제기는 의미가 크다.
▶사관(史觀)도 시대의 산물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한때 한국사를 보는 유효한 도구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주체성의 강조는 한국사에 끼친 외부의 힘, 외세와 우리의 상호작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시대적 사명을 다한 '내재적 발전론'을 넘어 한국사 연구를 더 풍요롭게 할 새롭고 다양한 사관을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