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석조 특파원

17일 새벽 예루살렘 북부의 팔레스타인 임시 수도 라말라 접경지대에 설치된 콘크리트 장벽 앞. "휘~익" 라말라 쪽에서 동아줄 한끝이 높이 8m의 장벽을 넘어 예루살렘 쪽으로 넘어왔다. 장벽 한쪽에 숨어 있던 한 청년이 나타나 넘어온 동아줄을 잡고 "얄라 얄라('어서어서'라는 뜻의 아랍어)"라고 말하며 신호를 보냈다. 이내 장벽 위로 허름한 옷차림의 청년들이 올라왔고, 3초 만에 줄을 잡고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이들은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인근 건물 뒤를 향해 뛰어갔다.

동아줄을 잡고 있던 청년은 "이스라엘이 설치한 '분리 장벽'에 갇혀 사는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법을 어기며 담을 넘는다"면서 "체포를 감수하고 이스라엘 쪽으로 넘어와도 일거리를 못 얻어 빈손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팔레스타인인은 출생지가 예루살렘이나 텔아비브 등 이스라엘 행정구역이 아닌 이상, 허가증 없이는 라말라 등 장벽으로 둘러싸인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만 살아야 하고 그 밖으로 나갈 순 없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이스라엘엔 '보안 장벽'이지만, 팔레스타인인에겐 '분리 장벽'이 돼 경제 활동과 같은 기본 권리가 침해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17일 저녁 예루살렘 북부와 팔레스타인 임시 수도 라말라 사이에 놓인 분리 장벽에서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동아줄을 타고 다시 라말라로 돌아가는 모습.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담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넘어와 불법 노동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이날 장벽을 넘은 이들 대부분은 인근에 준비된 차량에 태워져 예루살렘 외곽의 건설 공사장에 투입됐다. 이스라엘 정부에 따르면, 허가증 없이 장벽을 넘어 예루살렘 일대에서 불법 노동하는 팔레스타인 사람은 약 4만명. 최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내 실업률이 31%를 넘는 등 경기가 악화하면서, 이들의 숫자도 급격히 늘고 있다. 건설 업체 관계자는 "팔레스타인 사람도 이스라엘 시민과 똑같이 일당으로 250셰켈(7만5000원) 정도를 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라말라 출신 30대 남성 함단은 "장벽에 동아줄을 놓아주고 취업을 알선해준 이들에게 수입의 30% 이상을 떼어 줘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집에 가지고 가는 돈은 170셰켈(5만원) 정도"라고 했다.

['중동의 화약고'라 불리는 현재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에서 경기가 가장 좋은 라말라·베들레헴 같은 도시에서는 건설 근로자 일당이 100셰켈(3만원)이다. 이 때문에 구금되거나 번 돈의 수배에 달하는 벌금 물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담을 넘는 것이다.

오후 4시 무렵 건설 현장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다시 차에 올랐다. 새벽에 넘어왔던 장벽으로 이동했다. 이스라엘 경찰이 장벽을 순찰하기 직전에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오후 5시 장벽 앞에 모인 20여명은 동아줄을 타고 장벽을 올라 순식간에 라말라로 넘어갔다.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갓 스무 살의 마흐무드는 "온종일 '펠라펠(야채와 콩으로 만든 완자를 복주머니 같은 빵에 넣은 것)' 1개, 홍차 한 잔밖에 못 먹었다"면서도 "돌아가는 길에 양고기를 좀 사서 굶고 있을 가족과 나눠 먹을 생각을 하니 행복하다"고 했다.

☞분리장벽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 대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길이 500㎞의 콘크리트 장벽. 팔레스타인인들이 1987~93년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불법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규탄한다”면서 ‘인티파다(민중 봉기)’를 일으키자, 1994년 이스라엘 정부가 치안 유지 목적으로 장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신분 조사를 통해 ‘허가증’을 발급받은 팔레스타인인만 장벽을 통과해 이스라엘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200㎞ 길이의 장벽 추가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