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의 인문학
사이먼 가필드 지음|김명남 옮김
다산초당|576쪽|2만8000원
#1. 500여년 전 지도 위에 사자가 출현했다. 1583년 오스트리아 지도제작자 아이칭거가 그린 레오 벨기쿠스(Leo Belgicus). 중세, 저지대 국가로 불렸던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 중심의 유럽을 사자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지역 맹주인 스페인 제국의 문장(紋章)에 들어있던 사자를 고려하더라도 파격이었다. 이후 한 시대를 풍미한 '지도 위의 사자'는 국제정치 역학관계에 따라 몸통과 꼬리의 위치가 바뀌었다. 스페인의 함성이 드높을 때 사자의 꼬리는 영국을 강타했고, 1648년 뮌스터 조약으로 네덜란드가 스페인에서 독립하자 지도 위의 사자는 쪼그려 앉아야 했다.
#2. 햇볕을 가릴 만큼 커다란 발을 지녔다는 전설의 동방 민족 스키아포데스가 자신의 왕발을 자랑 중이다. 한쪽에는 누는 순간 돌처럼 굳어버리는 오줌으로 이름난 스라소니와, 황소가 사흘 동안 갈아야 할 땅 전체에 자신의 분뇨를 흩뿌리는 신화의 동물 보나콘이 있다. 악마적이지만 매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이 존재들의 무대는 영국 헤리퍼드 대성당의 세계지도, 마파 문디(1290년경 제작). 지상의 지리를 넘어 천상의 이데올로기를 한꺼번에 보여주겠다는 야망의 지도였다. 문맹인 대중에게 기독교인의 삶을 가르치겠다는 사제의 뜻이었다.
#3. 앨리너 맥과이어와 그 동료들이 2000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에 발표한 논문에 전 세계 모범생들은 환호했다. 그녀가 그린 '두뇌 지도'에서 런던 택시운전사들 뇌의 오른쪽 뒤편 해마가 평균보다 상당히 컸던 것이다. 런던 택시운전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려면 외워야 할 경로가 무려 400여개. 외우는데 평균 2~3년이 걸린다는 악명 높은 시험이다. 이 뇌지도의 교훈은 인간의 공간 지각력과 기억력은 유전적 특질이 아니라 학습되는 특질이라는 것. 따라서 당신도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등에 기고하는 저널리스트 사이먼 가필드(55)가 쓴 이 책의 원제는 'On the Map'. 하지만 번역판 제목도 꽤 어울린다. 지도 위의 인문학. 거시적으로는 그리스 신화부터 화성까지, 미시적으로는 인류의 두뇌까지 세밀하다. 여기서 지도는 단순히 위도와 경도로 표시되는 좌표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탐험사다. 22장으로 구성된 두툼한 책에서 박학다식한 작가는 지도 역사상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순간들을 유쾌한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상 밖으로 첫 발걸음을 뗐을 때의 지도 등 프톨레마이오스로 대표되는 백과사전적 지식의 학습과 위에서 예로 든 헤리퍼드 대성당의 지도 마파 문디를 푼돈에 팔아버리려 했던 신부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쾌감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즐거움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구글맵과 티맵이 종이 지도를 대체해버린 2015년의 세계에서 우리가 옛 지도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게 시대착오는 아닐까.
어쩌면 이 책의 가장 큰 의미는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끊임없이 깨우치게 해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례가 있다. 1976년 '뉴요커' 표지로도 등장했던 루마니아 출신 미국 화가 솔 스타인버그의 뉴욕 지도. 시점(視點)은 뉴욕 9번가와 10번가의 고층빌딩 상공에 있다. 당신은 이제 허드슨 강 너머를 내려다본다. 이 지점부터 원근(遠近)은 과학을 포기하고, 캔자스시티와 네브래스카를 순식간에 건너 뛰어 태평양을 돌파한다. 광활한 초원과 드문드문 있는 바위의 중서부, 뉴욕 땅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면적으로 표현된 태평양, 그다음에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희미한 중국, 일본, 러시아다. 그 밖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은 뉴욕이라는 것.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미국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자 반성이었다. 작가는 "오늘날 아이폰이 관습으로 정착시키다시피 한 '자기 자신을 지도화하기'를 스타인버그는 일찌감치 묘파했던 것"이라고 풍자했다.
'지도 위의 인문학'을 읽는 현재적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역지사지로 자신의 좌표를 반성하고 돌아보기. 우리는 이제 A에서 B로 가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 다른 곳으로 가는 인터넷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내비게이션은 묻는다. "현재 위치로 설정하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되묻고 삼갈 일이다. 인생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편도 여행일 뿐만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돌아오는 왕복의 여정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