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기역 받침이 들어가는 동사는 뭐가 있을까요?" "조기를 '엮다'" "배추를 '묶다'" "열무를 '솎다'".

지난 1일 오전 11시 경기 성남시 중원구 창세학교에선 한글 강의가 한창이었다. 머리에 흰 서리가 내려앉은 학생들 입에선 온갖 식(食)재료 이름이 튀어나왔다. 학생들은 한 손엔 샤프펜슬을, 다른 손엔 지우개를 쥐고 한글 강사 황영미(50)씨의 칠판 필기를 따라 공책에 한글을 써내려갔다. 남낙순(76)씨 등 할머니 16명이다.

남낙순 할머니는 아픈 어머니 곁에 있느라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몇 달 안 돼 학교를 그만뒀다. 공부엔 때가 있다더니, 한 번 때를 놓치니 그 길로 그만이었다. 친척들은 "영특하던 아이가 바보가 됐다"며 할머니를 볼 때마다 안타까워했다. 커서 시집을 갔고 웬만한 살림은 척척 해냈지만, 글을 모르니 은행일만큼은 남편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못 배운 게 한(恨)이 됐고, 70년 만에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공부 대신 엄마를 택했던 건 후회 안 해. 돌아가신 엄마는 임종 직전까지 내 이름만 불렀거든. 하지만 더는 은행 문 앞에서 벌벌 떨기 싫었어."

지난 1일 경기 성남시 창세학교에서 문맹 할머니들이 한글 교과서를 소리내어 읽고 있다. 한국방송통신대 교육학과 학생들로 구성된 문해교육 동아리 ‘페안제’ 회원들은 올해로 3년째 문맹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까막눈이었던 이모(55)씨는 죽음의 문턱에 두 번 다녀오고서 국어책을 들었다. 간경화를 심하게 앓던 이씨는 15년 전 11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2012년에는 아들에게서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 죽음을 준비하던 이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새 삶을 얻고 나니 글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한다. "늦게라도 배워야 해." 이씨가 한글을 배우고 쓴 첫 번째 시(詩) '나의 2모작 삶'의 한 구절이다.

'악바리' 조정자(66)씨는 이날 교실 맨 앞줄에 앉아 선생님의 설명에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충부 충주에서 6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조씨는 동생들을 업어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시절 큰딸은 집안의 살림 밑천이었다. "어려서 못 배운 팔자(八字)가 어디 가겠어?" 어려선 동생을 업어 키우고 커선 돈을 벌어 동생들을 학교 보냈다. 아들도 대학원 공부까지 시켰다. 언제부턴가 아들이 못 알아들을 '유식한' 말을 쓰면 "그래, 나 글자 모른다!'며 자주 화를 냈다. 조씨는 "한글학교에서 글을 배우고부터 아들과 마음으로 화해했다"고 했다.

한글 생일 축하합니다… 46개국서 온 세종학당 학생들 - 8일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각국 전통 의상을 입은 세종학당 외국인 학생들이 한글날을 축하하는 번개 모임을 가지며 웃고 있다. 이날 모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세종학당재단 초청으로 46개국 150여명의 세종학당 우수 한국어 학습자들이 참석했다.

정태선(68) 할머니는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만 65세가 되자마자 한글학교에 등록했다. "학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빠듯한 살림에 차비가 부담됐어." 정씨는 어릴 때 '계집아이는 공부할 필요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 초등학교를 접었다. 육십이 넘어 학교를 어렵게 다시 찾았지만 처음엔 도망치고 싶었다. "학교에 오면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식은땀이 줄줄 나. 이 나이에 한글을 배우려니 정말 어렵더라고. 그렇지만 내 몸이 부서질 때까지 다닐 거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문해(文解)교육 동아리 '페안제'가 할머니들에게 3년째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페안제는 교육학 용어 '페다고지(아동교육)' '안드로고지(성인교육)' '제라고지(노인교육)'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때를 놓쳐 한글을 배우지 못한 한국의 문맹(文盲) 인구는 264만명으로 전체 성인 인구의 6.4%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