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광복은 한국에 본격적인 '집 문제'를 야기했다. 광복 당시 38도선 이남 지역에는 대략 3백만 채의 주택이 있었다. 해외동포 귀환으로 인구가 증가한 데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주택들이 파괴되면서 주택 건설은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 초가삼간에서 고층아파트까지
해방 후 도시지역의 주택난은 심각한 상태였다. 중국, 일본 등지에서 돌아온 귀향동포와 북한에서 월남한 동포의 수가 1백20여만명에 달했고, 게다가 6·25전쟁으로 주택 60여만채가 파괴됐다.
1951년 1·4후퇴 때 월남피란민 1백50만여명이 몰려들자 주택난은 극심해졌다. 이른바 '판잣집'이 성행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전쟁 이재민용 '구호주택'이 등장한 것은 전쟁의 와중에서였다.
정부가 1·4후퇴 때 임시수도 부산에서 UNKRA(유엔한국부흥기구)의 재정지원으로 4.5평짜리 흙벽돌 집을 지은 것. UNKRA 직원들이 아프리카를 시찰한 뒤 흙벽돌집이 견고한 데 착안, 아프리카에서 흙벽돌 찍는 기계 80대를 가져와 우리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 뒤 정부는 '재건축주택' 5천5백채를 건설했다. 임시주택이 아닌 영구건물로 건평은 9평짜리. 당시 가구당 평균면적6평보다 50%를 늘려지은 것이었다. 주택은 방 두 칸, 마루, 부엌의 구조였다. 농촌은 1960년대 후반까지 초가집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가 1970년대들어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면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생활수준이 더 높아지면서 슬레이트 지붕은 또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요즘은 농촌에도 아파트가 대거 등장했다.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처음 등장한 것은 58년. 중앙산업㈜가 종암동고려대 옆에 5층짜리 17평형 아파트 1백52가구를 건설한 것이 아파트의 효시. 서양주택을 모방해 넓은 거실에 벽난로를 설치한 서구식설계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대통령도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주택공사에 대규모 아파트단지 건설을 지시했다. 우리 나라에 아파트시대를 연 마포아파트가 세워진 것은 바로 이때. 1961년 10월 착공해 이듬해 12월 모습을 드러낸 마포아파트는 주거문화의 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조국 근대화'를 내건 산업화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6층짜리에 연탄보일러와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근대식 아파트였다.그러나 1962년12월 전용면적 10∼15평 규모의 임대아파트 4백50가구 입주가시작됐을 때 분양률은 10%에 불과했다.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때문. 그러나 대학교수 등 중류계층들이 입주를 시작하면서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1964년 후반에는 프리미엄까지 붙었다고 한다.
1967년에는 초고층아파트가 처음 건설되기 시작했다. 한남동 '힐탑외인아파트'. 16층짜리와 17층짜리 1개동씩 두 개동 1백20가구였다. 1968년에는 한강맨션아파트와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잇따라 건설됐고, 1972년 준공된 '구반포아파트'는 본격 아파트시대를 연 대규모 단지였다.
'영동지구 개발 착공'(70년 8월) 후 10년 만에 강남은 허허벌판에서 아파트 숲으로 탈바꿈했다. 그로부터 20여년. 2003년 강남구 도곡동엔 최고 69층의 '타워팰리스'가 세워져 초고층 '주거실험'이 시작됐다.
▶ '새마을 주택' '불란서 주택'
1970년대 이전까지 도시와 상류층이 주거문화를 바꿨다면, 1970년대 이후는 농촌과 도시 중산층의 주택 형태도 크게 바뀐 격변의 시대였다. 대표적인 예가 '새마을 주택'. 당시 내무부가 12종류, 건설부가 15종의 표준 설계도를 제시하는 등 정부의 강력한 주도로 농촌 주택 풍경을 바꿔놓았다. 입식 부엌과 실내 욕실이 들어선 집이 생겼다.
도시에서는 이른바 '불란서 주택'이 대유행했다. 불란서 주택은 보일러 난방의 보급과도 밀접하다. 1972년 90%가 연탄 난방을 하던 서울 주택은 1977년이 되면서 보일러식 난방이 90%로 늘어났다. 지하(반지하)에 보일러실이 들어앉고 '미니 2층'식으로 다락이 보편화되거나 2층집이 늘었다. 지붕과 지붕이 만나는 삼각형 모양이 서구의 신전처럼 보이는 집을 '불란서 집'이란 별칭으로 불렀다.
이 무렵부터 가옥 구조를 부르는 이름도 서서히 바뀌게 됐다. 변기, 세면대와 목욕 공간이 합쳐져 '변소'가 아닌 '화장실'로, '부엌'은 '주방', '마루'는 '거실'로 좀 더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이름으로 변신했다.
▶▶ 화장실은 언제 집 안으로 들어왔을까?
화장실은 상류층 고급주택 중 집안에 욕실과 화장실을 둔 집도 간혹 있었지만, 화장실은 대부분 집안의 살림공간과는 멀리 떨어져 대문 옆이나 마당 한켠에 있는 게 보통이었다. 배설물을 쌓아뒀다 퍼내야 하는 재래식 화장실의 특성상 본채에 붙여두는 것이 비위생적이었기 때문이다. 밤에는 거의 모든 집에서 요강을 사용했다.
6·25전쟁 이후 한식주택 가운데 시멘트로 만든 욕실이 처음 등장했는데 욕조 옆 바닥에 타일을 붙여 앉을 수 있게 만들어 두고 때 미는 곳으로 이용한 게 특이했다. 이런 욕실은 보통 마당 한켠에 있었는데 욕실꼭대기는 장독대로 쓰기도 했다. 이런 형태의 욕실은 60년대 들어 일반 서민가정으로까지 확산됐다.
지난 1963년 만들어진 마포아파트는 중류층 생활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수세식 화장실과 개량식 부엌이 본격 도입된 것. 그러나 여전히 연탄 난방이어서 바닥이 방보다 한 단 낮고 부뚜막이 있는 것은 재래식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또 1970년대 후반까지 화장실도 쭈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는 일본식 변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욕조는 없었지만 변기 옆에 세면대가 놓여 화장실과 욕실을 겸한 지금의 형태가 선보인 것도 아파트 건설이 본격화하면서부터. 그러나 초창기에는 아파트에도 욕조가 없어 아파트 단지가들어서면 반드시 공중목욕탕이 단지내에 생겼다.
1970년대 중반부터 대량으로 생겨난 중앙 온수난방의 중산층 아파트 단지는 완전한 입식부엌과 양변기-욕조-세면대를 한곳에 갖춘 유닛욕실을 선보였다.
▶▶ 여성 허리 괴롭힌 부뚜막 70년대 이후에야 사라져
해방 당시 보통집 부엌의 전형적 모습은 바닥이 방바닥보다 70∼80㎝ 정도 낮고 아궁이에 불을 때 방구들을 데우면서 솥을 걸고 음식도 만드는 형태였다.
주부들이 부엌에서 난방과 음식 만드는 일을 모두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안방 옆에 바로 붙어 있어야 했다. 부엌 바닥은 흙, 벽은 회반죽이나 판자로 돼 있고, 천장은 베니어판으로 마감한 것이 보통. 아궁이 가장자리는 시멘트로 낮고 편편한 부뚜막을 만들어뒀다. 부엌일을 하려면 밖에서 물을 길어와 쓰고, 다시 바깥으로 가져다 버려야 했다. 상류층 일부만이 서양식 주택 영향을 받아 부엌을 입식으로 바꾼 정도였다.
1950년대 후반 국민주택이 보급되고 아궁이가 화목 대신 연탄을 때기 시작하면서 부엌은 재탄생했다. 가마솥은 가벼운 양은 솥으로, 사발들이 놓였던 살강은 유리를 낀 찬장으로, 연탄가스에 색이 변하는 놋그릇은 스테인리스 식기로 대체되었다. 찌개와 국을 끓이는 석유화로도 등장했지만 타일로 마감된 부뚜막은 여전히 주부의 허리를 괴롭혔다. 그 시절 주부들의 바람은 부엌 안에 수도 놓기였다.
1970년대 아파트의 시대가 열리고 보일러가 보급되면서 부뚜막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엌은 한발 내려서야 하는 낮은 공간에서 동일 평면의 생활공간 속 입식(立式) 주방으로 진화했다. 밥상이 식탁으로, 개수통과 찬장이 싱크대와 수납장으로, 석유화로가 전자레인지로 바뀌며 주방은 온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거듭났다. 우리의 주방이 양성 평등 사회의 도래와 함께 스마트 가전을 갖춘 시스템 키친으로 진화하고 있는 오늘, 남자 아이들의 부엌 출입을 막았던 "이놈 고추 떨어진다"는 금기어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 온돌서 연탄 거쳐 보일러로…
전쟁의 화마(火魔)가 산야를 불태우던 1952년 정부는 연탄 보급에 팔을 걷어붙였다. 박완서의 수필 '50년대 서울거리'의 한 구절이 증언하듯 "부엌에서 온종일 물이 끓고 필요할 때면 언제나 불을 쓸 수 있는 연탄아궁이는 나일론 양말 못지않은 복음이었다." 그러나 재앙도 함께 왔다.
1968년 12월 28일자 조선일보는 "서울시장(市長)이 제독(除毒) 연탄 발명자에게 사례금을 걸었다"고 보도했다. 연탄 난방비율이 75%에 달한 1960년대 아궁이는 한 세기 전의 '호환·마마'보다 더 우리를 떨게 했다. 동치미 국물을 들이켜는 것 외에는 치료법이 없던 당시 해마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70만명 중 3000명이 넘는 이가 불귀(不歸)의 몸이 되고 말았다. 1969년 고압 산소장치가 나오면서 많은 이가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지만 1974년에도 서울에서만 연탄가스 중독자가 19만8000명에 이르렀고 그 중 850명이 사신(死神)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기름과 가스 보일러가 대중화되면서 겨울철이면 신문 사회면을 채우던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사망을 알리는 비보(悲報)는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