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이성훈 특파원

지난해 말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운영하는 프라포트(Fraport)는 그리스 주요 지방공항 14곳의 운영권을 12억3000만유로(약 1조6000억원)에 낙찰받았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를 포함해 산토리니, 로데스, 크레타, 사모스 등 관광객이 많은 알짜 공항들이 포함됐다. 인수 당시부터 헐값 논란이 제기됐고, 지난 1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취임한 후 사실상 매각 작업이 중단됐다. 프라포트도 최근까지 "계약 이행이 불확실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달 그리스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간 3차 구제금융 협상안이 체결되면서 이런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그리스가 채권단과 500억유로(약 64조원) 국유자산 매각에 합의한 것이다. 그리스 법률회사인 '기지스 & 어소시에이츠'의 에마누엘 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프라포트가 그리스 공항을 인수하는 데 걸림돌이 제거됐다"며 "환경평가 등 필요한 작업들이 이달 중 시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스는 500억유로 자산 매각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항만, 우편, 철도, 고속도로, 전력, 천연가스·수도 공급, 해변, 섬 등도 매물로 내놓아야 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그리스 국유자산의 '폭탄 세일'이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그리스뿐 아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 재정위기에 시달리는 유럽 국가들이 잇따라 국유자산 매각에 나서고 있다. 독일·영국 등 이웃 유럽국가뿐 아니라 자금 사정이 좋은 중국·중동 투자자들이 군침을 흘리며 매물 인수에 나서고 있다.

자산 '폭탄 세일' 나선 남유럽 국가들

그리스의 경우, 프라포트의 지방공항 인수 건을 비롯해 치프라스 취임 후 중단됐던 국유자산 매각 작업이 본격적으로 재개됐다. 우선 국영 가스공급망회사(DESFA)의 지분 매각 협상을 아제르바이잔 석유공사(SOCAR)와 다시 시작할 계획이라고 현지 매체인 카티메리니가 지난 29일 보도했다. 아제르바이잔은 2013년 말 DESFA 지분 66%를 4억유로에 매입하는 입찰을 따냈지만, 이후 최종 계약 체결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새롭게 매물로 나올 이름들도 거론되기 시작했다. 현지 매체인 '그리스 리포터'는 "테살로니키의 컨테이너 부두와 정부 청사, 헤라클리온의 예전 미국 공군기지도 매물 리스트에 포함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리스 은행 지분도 시장에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 정부는 구제금융 자금 일부를 은행 회생 작업에 투입할 예정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과정에서 추가로 확보한 정부 지분이 매물로 나올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리스가 구제금융 후속 조치로 대대적인 국유 자산 매각에 나섰다. 피레우스 항(왼쪽 사진)과 산토리니 공항(오른쪽 사진) 등이 매각 대상으로 거론된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 EU기와 그리스 국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위쪽 사진).

구제금융을 받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국유자산 매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스페인 정부가 2013년 은행권의 부실자산을 모아 설립한 배드뱅크 'SAREB'의 에체고엔 대표는 지난달 "갈리시아와 발렌시아 등 해변의 부동산을 대거 매각하는 작업을 추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해외 투자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지역의 주택을 매물로 내놓겠다는 것이다. 포르투갈 정부도 지난 23일 철도화물 운영회사인 'CP 카르가'를 스위스의 글로벌 해운회사인 'MSC'에 5300만유로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중동 자본 관심… 헐값 매각 논란도

매물로 나오는 유럽의 각종 자산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투자자는 중국·중동 자본이다. 지난해 그리스는 아테네 남쪽에 있는 옛 국제공항 부지와 인근 해변 개발사업권을 7억유로에 매각했다. '엘리니콘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이 개발사업은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의 2배 넓이나 되는 지역에 특급호텔과 쇼핑센터, 고급 주택 등을 짓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중국과 아부다비 자본이 참여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달 니스와 리옹 공항을 내년 중반까지 민영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오는 9월부터 지분 매각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두바이의 경제전문 주간지 아라비안비즈니스는 "아랍에미리트(UAE) 펀드들이 니스 공항을 16억달러(약 1조9000억원)에 인수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재정위기에 몰린 국가들이 서둘러 자산 매각에 나서면서 제값을 못 받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달 중국의 투자그룹 '트자넨(Tzaneen)'은 스페인 지방공항 '시우다드 레알 국제공항'을 부채 5억2900만유로(약 6600억원)를 떠안는 조건으로 1만유로(약 1250만원)에 단독 응찰했다. ◇노조 반발 등 매각 장애물도 많아

유럽 국가의 자산 매각 작업엔 장애물도 많다. 우선 노조의 반대다. 그리스전력(DEH) 노조는 정부의 지분 매각에 반대해 2011년과 2014년 일부 지역의 전기 공급을 차단하며 극렬히 저항했다. 이 때문에 그리스는 애초 채권단과 합의한 DEH 민영화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지난 1월 치프라스 집권 후 매각 작업은 중단된 상태다. 또 국유자산 가운데 부동산은 소유권 분쟁에 휘말린 경우도 많아, 매각 작업이 더디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IMF는 지난 6월 보고서에서 "민감한 정치·사회적 압력 때문에 그리스 국유자산 매각은 매년 5억유로(약 6400억원) 정도만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스 정부가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는 한, 500억유로 자산을 파는 데 100년이 걸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는 1·2차 구제금융 때도 채권단과 2015년 말까지 500억유로 상당의 국유자산을 매각하기로 합의했으나, 현재까지 32억유로(약 4조1000억원)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채권단이 그리스 정부를 불신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