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서 필리핀의 작은 섬 보라카이에 도착하기까지 6시간 남짓. 담요 한 장, 물 한 잔 나오지 않는 작은 비행기가 필리핀 칼리보 공항에 도착했다. 기체 밖으로 몸을 내밀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폐부로 파고든다. 이 비행기는 보라카이로 오는 유일한 직항 항공편이다.

공항 앞에는 보라카이로 들어가는 선착장까지 관광객을 나르기 위한 봉고차들이 즐비하다. 그중 한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 터덜거리는 봉고차로 1시간 30분을 달려 카티클란 항구에 도착, 또다시 작은 배로 20여 분을 이동해서야 보라카이 섬에 도착했다. 유명 관광지라는 수식어를 빼면 그야말로 시골 중의 시골. 이곳에 1990년대 인기 아이돌그룹 영턱스클럽의 멤버, 임성은이 살고 있다.

최근 한 방송을 통해 공개된 그녀의 일상이 화제가 됐다. 대저택이라 묘사된 집에는 필리핀인 요리사까지 딸려 있었고,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스파 사업은 꽤 크게 번창한 터였다. 가요계를 떠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뭘 하며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보라카이에서의 삶은 정말 방송에서처럼 화려하고 럭셔리할까. 그녀를 만나기 위해 보라카이를 방문했다. 먹고 마시고 인터뷰하고 촬영하며 장장 48시간을 붙어 있는 동안 그녀의 민낯을 보았고 취중진담을 들었다. 참고로, 노출을 극도로 꺼린다는 임성은의 남편은 기자가 도착한 날 한국으로 떠나 아쉽게도 지면에 담지 못했다. 

"내쫓기다시피 영턱스클럽 탈퇴"

보라카이로 떠나기 2주 전, 서울에서 임성은을 만났을 때 그녀는 한껏 들떠 있었다. 지난 2월 1990년대 인기가수들이 총출동한 콘서트 '백 투 더 90's 빅쇼'로 무려 10여 년 만에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결혼과 동시에 가요계를 떠났지만 여전히 자신을 기억해주는 팬이 많다는 건, 그걸 두 눈으로 목격하는 건 역시 가슴 벅찬 일이다.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 학교 땡땡이치고 쫓아왔던 팬들이 지금도 똑같이 플래카드를 들고 와요. 아이 낳고 직장 다니는 친구들이 부모님한테 아이 맡겨놓고 날 보러 온 거야. 전율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오래된 팬들이기 때문에 잔소리를 무지하게 해요. '언니, 저번 옷은 괜찮았는데 이번 옷은 별로였어요' 하면서 정말 디테일하게 지적해줘요. 이젠 그야말로 가족이죠."

영턱스클럽의 '정'을 따라 부르던 팬들이 이제는 30대가 됐다. 최근의 복고 열풍도 한몫했겠지만, 그 시절 워낙 큰 인기를 구가한 만큼 영턱스클럽을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특히 리더 임성은의 인기는 특별했다. 그룹 투투의 객원멤버로, 그전에는 솔로가수로도 활동하던 그녀는 꽤나 잔뼈 굵은 가수이기도 하다.

"나 울었잖아요.(웃음) 너무 벅차니까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고요. 1만2천 명이 한목소리로 '울지 마!' 외치는데, 같이 울었어요.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린 다음 눈을 마주치는데, 관객들도 다 같이 울고 있더라고요. 우리가 이 무대에서 같이 호흡하고 있구나, 나도 늙었지만 너희도 같이 늙었구나, 하면서요. 같은 시대 사람이라는 끈끈함이 되게 강하게 왔어요."

팬도 팬이지만 동료 가수들과의 재회도 반갑다. 가요계 '베프' 소찬휘·도원경 등 몇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10여 년 만에 보는 이들이다.

"동창회하는 기분이었죠. DJ.DOC의 (김)창렬이는 늘 똑같고 (김)하늘이 오빠도 변한 게 하나 없더라고요. 왁스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제가 20대 때는 사적으로 사람들을 잘 안 만났어요. 지금은 아줌마가 돼서 막 이러지만 그때는 낯을 많이 가렸거든요. 사람들을 두루두루 만나고 다니지 못한 게 제일 아쉬워요."

스캔들이라도 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그 시절, 더군다나 아이돌에게 누구를 만나 사적으로 친분을 쌓는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하나 더, 그때를 떠올리면 아쉬운 것 이상으로 화나는 일도 많다.

"옛날에는 소속사가 갑이잖아요. 그렇다 보니 인세 같은 걸 전혀 못 받는 일이 많았어요. 하루는 실장이 20만원을 건네면서 종이에 사인을 하래요. 왜요? 뭔데요? 그랬더니 다 그렇게 사인을 한대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작사·작곡한 곡들의 저작권이 다 그 사람한테 넘어갔던 거죠. 그 당시는 그렇게 주먹구구식의 일들이 빈번했어요. 지금하고는 너무 다른 시대였죠."

그런가하면, 데뷔와 동시에 정상에 오른 영턱스클럽을 활동 1년 만에 탈퇴한 건 왜였을까. 당시 임성은은 팀 내 리더이자 제일 잘나가는 멤버이기도 했다.  

"동생들이 어느 날 저한테 '소속사에서 자기네 돈을 안 준다'고 그러더라고요. 리더인 제가 얘기를 해달라고요. 그 당시엔 저도 (윗사람들에게 말 꺼내기가) 무섭고 떨리고 부담스러웠죠. 그래도 용기 내서 말을 해볼 테니 너희들이 내 뒤에만 있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실장한테 가서 얘기를 꺼냈는데, 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까
제 뒤에 아무도 없더라고요."

동생들 대신 총대를 멨지만 본전도 찾지 못했다. 모두가 발뺌하는 상황에서 임성은은 졸지에 팀에 분란을 일으킨 멤버가 되어 있었다. 멤버들을 통한 회사의 압박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실장이나 부장,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이 괴롭혔죠. 거의 5~6개월을 많이 힘들게 했어요. 결국엔 실장이 '너 영턱스 2집까지 할래, 아니면 솔로로 나갈래?' 묻더라고요. 버티다, 버티다 결국 '솔로로 나갈게요' 했죠. 안 그러면 왜 그 잘나가던 영턱스클럽에서 나갔겠어요."

이듬해 영턱스클럽이 2집 으로 활동을 이어갈 때 임성은은 솔로로 제 갈 길을 걸었다.

1집 타이틀곡 '미련'으로 얼마간의 성공은 거뒀지만 팬들은 다섯 명이 모두 모인 영턱스클럽을 그리워했다.

"많이 외로웠죠.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위축되어 있었고 사람이 무서웠어요. 더 속상한 건, 대중이 다 저 잘나서 나간 줄 안다는 거예요. 이젠 그때 일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웃음)

과거 일을 떠올리며 씁쓸해하던 그녀가 이내 환하게 웃어 보인다. 어차피 지난일에는 연연해하지 않는 것, 그게 임성은이 삶을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사는 방식이다.

보라카이에서 만난 6세 연하 남편 "친구 같은 반려자"

투투, 영턱스클럽에 이어 임성은과 미즈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계속하면서 그녀는 참으로 오랜 시간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불현듯 쉬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휴식이 필요한 시기였어요. 처음에는 연기하는 동생 몇 명과 보라카이에 와서 9일 정도 머물렀죠. 있다 보니 '내가 있을 곳이 여기구나' 싶더라고요. 아침에 해변가 의자에 앉아 모닝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이게 행복이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6개월 정도 머물 작정으로 보라카이에 다시 돌아왔죠."

한국에서는 "어미오리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오리처럼" 살았다면, 보라카이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스킨스쿠버도 배우고 골프도 치면서 잠시 잊던 삶의 여유를 되찾았다.

"(가수를 하면서) 20대부터 30대까지 청춘의 대부분을 시간에 쫓기면서 살았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 편안하게 내 시간을 가진 적이 없었죠. 근데 이곳에선 아니었어요."

그렇게 6개월을 이 작은 섬에서, 손바닥처럼 좁은 한인사회에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이 사람 저 사람 만날 기회도 많아졌다. 지금의 남편도 이때 처음 만났다.

"아는 오빠가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며 어딜 데려갔어요. 근데 마침 그날이 신랑 생일이었죠. 그 사람 생일 파티 하는 곳을 데려간 거예요. 사실 첫인상은 둘 다 별로였어요.(웃음) 근데 겪어보니까 괜찮더라고요. 잘 챙겨주는 스타일이고요."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연상(여)연하(남) 커플, 심지어 나이 차는 6살이었다. 그렇게 한국과 보라카이를 오가는 장거리 연애가 시작됐고, 둘은 보란 듯이 1년 6개월을 만난 끝에 2006년 결혼에 골인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생전 그래본 적이 없는 애가 마음을 딱 굳히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얘기를 하니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뭘 보고 재고 따지겠냐. 한번 데려와봐라' 하시더라고요. 바로 데려와서 소개시켜드리고 결혼 준비를 하게 됐죠."

결혼 후 임성은의 터전은 자연스레 보라카이로 옮아갔다. 의지할 가족이라고는 남편밖에 없는 그곳에서 그녀는 사람에 치이기도 하고 위로받기도 하면서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어갔다.

"보라카이에 간 초창기에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한번은 점을 아주 잘 보는 사람이 저희 커플을 두고 '저 커플은 1년 안에 깨진다'라고 악담을 하더래요. 더 상처받은 건,
저희랑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저희를 두고 내기를 했다는 거죠. 나중에야 그걸 알았어요. 저랑 신랑이랑 보란 듯이 더 잘 살았죠." 

올해 결혼 9주년을 맞은 커플은 여전히 신혼처럼 달달하다. 최근 들어 방송과 공연으로 부쩍 바빠진 그녀가 자주 자리를 비워도 남편은 잔소리 한번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 잘할 수 있어. 당신은 최고니까'라는 문자와 함께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임성은은 이런 남편이 늘 고맙다.

"우리는 부부끼리 캐묻거나 구속하지 않아요. 서로 믿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친구처럼 살고 있어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만 지내길 바라죠."

아이가 있으면 지금보다 플러스알파로 행복할까?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언젠가는 자신들을 똑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

"아이를 갖고 싶어서 노력도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시험관아기 시술을 위한) 수정체를 만들어놓았어요. 지금은 많이 바쁘고 해서 잠시 미뤄두고 있지만 꾸준히 노력할 생각이에요."(웃음)

자금난, 남편의 대수술, 모친의 파킨슨병… 사업 성공까지 험난하던 시절

한두 차례 방송을 통해 그녀의 근황이 공개되며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만큼 주목받은 이유는 보라카이에서의 성공적인 사업 때문. 실제로 보라카이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포세이돈 스파'는 임성은이 억척스레 일군 노력의 결과물이다.   

"처음에는 풀 빌라를 지으려고 했어요. 근데 보라카이를 눈여겨보니까 어떻게 돈이 흐르고 시스템이 작동하는지, 돌아가는 상황이 보이더라고요. 리조트도 좋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 알고, 자신 있는 스파 사업을 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스파 사업을 시작하게 됐죠."

그녀는 보라카이에 또 하나의 럭셔리 풀 빌라를 만들기보다 기존 스파 시설을 업그레이드한 럭셔리 스파가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보라카이에 수영장이 딸린 스파가 없었어요. 근데 저희가 그걸 만들었죠. 무엇보다 풀 빌라는 비싸서 못 간 사람들이 저희 스파에 오면 풀 빌라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을 충분히 느끼고 돌아가요. 특히나 커플끼리 오면 정말 로맨틱하게 깨 볶죠."(웃음)

이제는 중국에서도 취재를 올 만큼 럭셔리 스파의 원조로 자리 잡았다. 물론 시작부터 평탄했던 건 아니다.

"오픈 전 공사 시기에 한 번 깜박하고 자재창고 문을 잠그지 않은 적이 있어요. 다음 날 가보니 자재를 다 훔쳐갔더라고요. 멀쩡한 철근을 토막 내서 가져갔어요. 철근이 하나에 1백만원이라고 하면 토막 난 철근은 10만원밖에 못 받아요. 근데 그걸 훔쳐가기 쉽게 다 토막을 내서 담장 뒤에 던져놓았더라고요. 나중에 팔아먹으려고요.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하긴, 선풍기도 뜯어갔으니까요."

그녀의 집 별채에 딸린 작은 골프연습장 천장에 달린 선풍기(ceiling fan)를 두고 하는 말이다. 술자리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처럼 나온 말이지만, 사실 정말 분하고 짜증나는 일일 거다. 워낙 가난한 나라여서인지 자동차 기름이나 남의 집 쌀통에서 쌀을 빼가는 일은 부지기수. 공사가 마무리된 후라고 다르지 않았다.  

"2008년 10월 15일에 오픈을 했어요. 손님은 별로 없는데 월급날이 너무 빨리 오는 거예요. 월급 맞추느라 동동거리고 그랬죠."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한국에 있는 어머니의 파킨슨병 투병 사실을 알았을 때. 이조차 뒤늦게 알았지만, 당장 한국으로 달려갈 수도 없었다. 이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엄마가 당신이 파킨슨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안 하셨어요. 일에만 전념하라고요. 그런데 돈 때문에  부탁할 게 있어 몇 번을 전화했더니 나중에야 '너는 엄마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구나' 하시더라고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져요. 눈물이 막 쏟아지는데 엄마한테 우는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고, 나는 나대로 힘든 상황인데 이걸 보이면 안 될 것 같고…."

눈시울이 불거져 잠시 말을 잇지 못한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엄마가 아프다는데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예요. 여기에 벌여놓은 일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때 신랑도 교통사고로 여섯 번이나 수술해서 입원해 있었고, 공사는 공사대로 진행되는데 돈은 바닥이 보이고, 그래서 돈 좀 빌려달라고 전화를 했는데 엄마는 아픈 상황이었어요."(눈물을 닦는다.)

그렇게 한바탕 비가 쏟아 붓더니 그 후로는 땅도 더 단단히 굳어진 모양새다. 올해로 7년째를 맞는 포세이돈 스파는 예약이 어려울 만큼 성황리에 영업 중이고, 몸을 잘 가누지 못하던 어머니는 가끔 딸이 있는 보라카이로 놀러 오실 만큼 건강이 좋아지셨다고. 

"스파를 지은 이듬해 부모님이 오셨어요. 뿌듯했고 (기분이) 최고였죠. 근데 엄마 눈에는 늘 제가 애기로 보이니까 느끼는 감정이 다르셨나 봐요. 감자탕을 끓여서 드렸더니 '밥도 못하던 네가 언제 이런 걸 배워서 할 줄 알게 됐느냐'면서 기특해하고 대견해하면서도 희한해하시는 거예요. 그러다 제 팔을 보고 우시더라고요."

팔꿈치에, 손등에 여기저기 덴 상처가 가득한 걸 보고 어머니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간 전화로 단 한 번도 힘들다는 소리를 안 하던 딸이다.
  
"(스파 오픈 전에) 일반 직원과 테라피스트 모두 연습을 시켜야 되는데, 점심시간에 밥 먹고 오라고 하면 3시간이 걸려요. 당시에는 스파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밥이고 반찬이고 40~50인분을 제가 집에서 해다가 날랐어요. 엄마 아프지, 신랑 아프지, 그런 상황 겪고 나니까 '나 여기서 엎어지면 절대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앞만 보고 달렸어요. 그렇게 매일 매일 밥을 해다 나르니까 손을 여기저기 데어 자국이 남았어요. 그걸 보고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되신 거죠. (또 눈물을 훔친다.) 지금 생각하면 저도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신기해요."

그런 노력과 애착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공도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스파 사업가답게 피부나 몸매 관리에도 철저하다. 그녀의 집 부엌에는 밥을 먹고 나면 체중을 재지 않을 수 없는 동선에 체중계가 놓여 있는데, 심지어 2㎏이 더 나오게끔 조작해놓았다. 경각심을 잃지 않으려는 나름의 비책이라고.   

"일단 운동을 정말 많이 해요. 1주일에 3~4일 골프라운딩을 18홀씩 돌아요. 4시간 정도 걸리죠.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몸무게를 달아요. 1㎏은 빼기가 쉬운데 2~3㎏ 쪄버리면 빼기가 힘들거든요."

나흘 가까이 붙어다니며 관찰한 그녀는 매사에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가끔 너무 에너제틱해서 쫓아가기 힘들 때도 있지만, 그 에너지 덕분에 지금 이만큼 성공한 사업가로 우뚝 선 것이 아닐까. 도시가 익숙한 사람에겐 조금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임성은의 보라카이는 언제나 생동감과 활기로 넘친다.    

"10%만 내려놓으면 즐거워요. 지금까지 저는 한국에 살면서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어요. 항상 시간에 쫓기면서 살았죠. 근데 보라카이에서는 시계를 볼 필요가 없어요. 이게 나한테 주어진 행복이구나, 그럼 이걸 즐기자. 이게 제 신조예요."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6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