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마지막 날, 집에서 가까운 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에 들렀다.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 갔는데 그곳은 벌써 봄이었다. 냉이, 달래는 물론 유채, 두릅, 방풍나물, 쑥, 돌나물 등이 봄나물 코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 쑥이 벌써 나왔네요. 하우스 재배겠죠?" 백화점 점원에게 물었더니 "거문도 노지(露地)에서 재배한 것"이라고 했다. "아, 남쪽은 벌써 따뜻하군요." 나물 앞에서 봄 얘기로 꽃을 피웠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오려니 미안해서 그나마 덜 비싼 방풍나물을 조금 샀다. '바람을 막는다'는 뜻의 방풍(防風)나물은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자란다. 백화점에서 잎을 씹어보니 쓴맛과 함께 상큼한 향이 입 안에 퍼졌다.
돌나물, 방풍나물, 땅두릅, 씀바귀, 돌미나리, 원추리, 쑥, 벼룩나물, 왕고들빼기, 지칭개, 머위, 곰취, 산마늘, 고사리, 물냉이, 고추냉이…. 한국에서 먹어본 봄나물이다. 봄나물은 쓴맛과 떫은맛이 강하다. 막 나오기 시작한 새싹을 벌레나 새가 먹어버릴까봐 자연적으로 생겨난 방어책이다. 다소 쓴 데도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맛이고 영양이기 때문이다. 봄나물은 겨우내 쌓인 독소를 배출하고 몸을 동면에서 눈뜨게 해준다.
올해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먹은 봄나물은 설 연휴 전부터 이웃 수퍼에 나오기 시작한 유채나물이다. 일본에서 자란 내게 봄이라고 하면 역시 유채다. 일본어로 '나노하나'라고 한다. 입춘 일주일 뒤 세찬 봄바람을 신호로 유채꽃 전선이 일본 남동(南東)에서 단번에 북상하기 시작해 독특한 쓴맛과 향으로 열도에 봄을 알리며 돌아다닌다.
해마다 3월 3일 히나마츠리날(히나 인형을 장식해 여자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행사)이면 엄마는 유채꽃을 섞은 지라시스시와 유채꽃절임을 꼭 준비했다. 엄마의 꽃요리를 감주와 함께 마시며 봄의 숨결을 들이켰다. 한국에 온 후론 우리 이웃 수퍼에 유채나물이 들어오면 비닐봉지에 한가득 사 들고 어린 시절의 추억에 싸여 혼자 흡족해한다.
요전에 벨기에인인 남편의 동료가 한국에 출장을 왔다. 우리 집에서 그가 좋아하는 생선회와 초밥, 대합 장국, 봄동과 유채나물 등 일본과 한국의 봄 반찬을 몇 가지 준비했다. 그는 생선회를 깨끗이 비우고, 봄동 겉절이도 잘 먹었지만 유채나물에는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청자 그릇에 가지런히 담긴 연노란 유채가 유럽인에게는 기묘한 식물로만 보였으려나.
일본인에게 유채가 봄을 알려주는 나물이라면 한국인에겐 쑥이 아닐까. 시어머니는 해마다 쑥으로 떡을 만들어 준다. 쑥은 일본에서 '요모기'라고 하며, 한국처럼 하천 제방이나 들판에서 자생한다. 벨기에인 친구가 유채에 젓가락을 대지 않았던 것처럼 일본에 살던 무렵에는 나도 쑥을 입에 대지 않았다. 어쩐지 냄새가 싫었다. 20대 후반 한국에 와서 하숙을 하다 주인아주머니의 권유로 반신반의하며 먹었던 쑥 주스가 오랜 편견을 깨 주었다.
며칠 전 한 발 먼저 봄을 맛본 지인은 대구 근교 청도의 한재미나리가 아주 맛있다고 흥분해서 가르쳐 주었다. 요리를 하는 사람에게 3월은 설레는 계절이다. 경동시장에 전국 각지에서 노지 재배한 나물을 파는 가게가 있다. 좀 더 따뜻해지면 지리산 자락에 나물을 캐러 가보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일단은 경동시장부터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