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이석기(53)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선동 혐의에 대해 징역 9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번 판결은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내란 사건 이후 사실상 사문화된 형법상 내란죄에 대해 대법원이 35년 만에 내놓은 판결이다. 대법원은 이 전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죄에 대해선 무죄를, 내란선동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한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내란음모인가 내란선동인가?
이 전 의원은 1심에서 내란음모와 내란선동죄가 모두 유죄로 인정됐다. 하지만 항소심에선 내란음모죄는 무죄가 선고됐다. '음모'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2명 이상이 내란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합의'가 있어야 하는 데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합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1심은 "총책인 이 전 의원의 발언에서 나타난 내란 실행 의지와 김일성 수령관에 기초한 조직원들의 충성도, 2개월에 걸친 사전준비와 혁명적 결의, 구체적인 폭동의 윤곽 등에 비춰보면 내란을 모의한 점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반면 항소심은 "내란 행위의 시기, 대상, 수단 및 방법, 실행 또는 준비에 관한 역할분담 등 어느 것도 윤곽이 특정되었다고 볼 수 없고, 실제 내란범죄 실행을 위한 준비 행위까지 나갔다고 인정할 만한 사정이 없어 내란음모죄는 무죄"라고 했다.

2013년 9월 4일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체포동의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의원실을 나서고 있다.


대법원 역시 "이 전 의원의 회합에서의 발언은 참석자들에게 특정 정세를 전쟁 상황으로 인식시키고, 가까운 장래에 구체적인 내란의 결의를 유발하거나 증대시킬 위험성이 충분하다"며 내란선동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 전 의원과 회합 참석자들이 선동의 단계를 넘어 국가기간시설 파괴 등 폭력적 방안을 실행하기 위한 추가 논의를 했다거나 준비를 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며 내란 음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확정했다.

다만 신영철 대법관 등은 소수 의견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상황이 되면 회합에서 논의했던 방법이나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내란 실행행위로 나아갈 개연성이 크다"며 내란음모죄 역시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란의 실현 가능성은 있었나
내란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실질적 위험성과 실현 가능성도 있어야 한다. 1심 재판부는 "비밀 회합에서 논의된 기간시설 파괴 등 테러 행위는 소수 인원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고, 폭동의 세부 계획이 없었더라도 논의된 내용으로 볼 때 폭동의 실현 가능성과 위험성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항소심 역시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중간에 발각돼 내란 실행 단계까지 이르진 못했지만, 실행을 위한 조직과 능력을 갖췄고 그대로 뒀다면 내란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대법원 역시 항소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RO의 성격과 총책은
검찰이 비밀혁명 조직으로 규정한 'RO'의 실체도 재판 내내 핵심 쟁점이었다. 1심은 "RO는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수령관에 기초한 지휘 통솔 체계를 갖춘 실존하는 비밀 지하 혁명 조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RO 총책은 이석기 전 의원이라고 지목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항소심과 마찬가지로 검찰이 비밀혁명조직으로 규정한 'RO'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강령이나 목적, 지휘통솔 체제, 조직보위체계 등을 갖춘 조직이 존재하고, 회합에 참석한 130명이 구성원이라는 의심이 들지만, 회합 참석자 130명이 RO조직에 언제 가입했고,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RO의 실체가 부정된 만큼 이 전 의원의 비밀혁명조직이라는 것도 인정되지 않았다.
④국가보안법 위반 인정
대법원은 이적표현물 소지 등 이 전 의원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앞서 1심과 2심은 이 전 의원이 이적 표현물을 다량 소지하고 '혁명동지가' 등 북한을 찬양하는 혁명 가요를 불렀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대부분 유죄를 인정했다. 하급심 재판부는 "이 의원 주거지와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압수된 김일성 회고록과 같은 북한 서적 등은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이적성(利敵性)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이 사실상 최초로 내란선동죄와 내란음모죄의 성립 요건 등을 구체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