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음악가 모리스 라벨(1875~1937)이 작곡한 '볼레로'는 우리에게도 매우 잘 알려진 음악이다. 169번 반복되는 하나의 리듬과 2개의 멜로디가 15분 넘게 이어지지만, 조금씩 바뀌는 악기의 음색을 통해 지루함을 극복하고 있다. 끝으로 갈수록 현악이 더해지고 음량이 커지면서 극적으로 마무리된다.
라벨은 53세에 이 곡을 썼는데, 이때는 이미 인지 기능 장애를 보이던 시기였다. 라벨의 뇌질환은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언어장애로 시작하여 심한 인지 기능 장애로 진행됐다. 그러다 9년 후인 62세에 죽음을 맞는다. 그의 증상을 현재의 진단 기준에 맞추면, 진행성 언어장애 타입의 전두측두치매로 보인다. '볼레로'에서도 전두측두엽 기능장애로 잘 나타나는 보속증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자극이 바뀌어도 같은 반응을 되풀이하거나, 자극으로 생긴 심리적 활동이 그 자극이 없어져도 일정하게 지속하는 증상을 말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하던 행동이나 생각이 계속 반복된다. 볼레로의 음악적 진행은 보속증이 예술로 승화된 것이 아닐까 한다.
볼레로는 화가 앤 아담스에 의해 그림으로 재탄생한다. 앤 아담스는 교통사고를 당한 아들을 돌보기 위해 과학자의 삶을 그만두고 미술가로 전환한 캐나다 여성 화가다. 1994년, 라벨이 볼레로를 작곡했을 때와 같은 나이인 53세가 되는 해에 앤 아담스는 '볼레로를 해석하며'〈사진 참조〉라는 독특한 그림을 그린다. 볼레로의 반복되는 멜로디가 음색과 음량, 음높이에 따라 비슷한 도형이 반복되는 형식으로 표현됐다. 이 그림을 그린 수년 후엔 그녀도 진행성 언어장애 타입의 전두측두치매로 진단받는다.
이 유형의 치매는 이상행동이나 성격장애와 함께 언어장애가 초기부터 나타난다.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떠오르는데 말로 잘 표현이 안 된다. 말을 더듬게 되고, 말하기, 읽기, 쓰기가 어려워진다. 기억장애는 증상이 시작되고 수년이 지나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치매로 진단받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 기간에 과거와 다른 행동이나 성격 변화로 가족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고,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총괄하는 전두엽 기능에 장애가 오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계획성이나 논리성이 사라지고, 판단력이 감소한다. 성적인 행동이 과도해지거나 반복적인 행동을 고집하기도 한다. 감정 변화가 심하고 쉽게 화를 내며 남의 생각이나 감정에 배려가 없어진다. 이러한 전두엽 기능장애는 전두측두치매와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뇌손상 환자에게서 잘 나타나다.
50대에 주로 나타나고 초기에는 기억장애 없이 다양한 증상을 보인다. 비교적 흔한 질환이지만 정확한 진단이 쉽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흔한 '드문 질환'으로 불린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뉴스에 나오는 중·장년 인사를 보면, 전두측두엽 기능장애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