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지니고 있어서 난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에요…. 내 마음을 내 동작 안에 담아서 나타낼 수 있으니까요."
가슴에 코르사주(여성이 옷에 다는 꽃 장식)를 달고 자줏빛 숄을 두른, 체구 작은 백발 할머니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기자에게 말했다. '한국 춤의 대모(代母)'라 불리는 김백봉(87) 경희대 명예교수다. 부채춤과 화관무, 한국 신무용의 형태와 기틀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이어졌다. 미수(米壽)를 맞아 제자들이 마련한 공연 '청명심수(淸明心受), 김백봉 춤의 아리랑'(12~1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앞두고 조금은 들떠 보였다.
"여섯 살 때였어요. 평양 우리 집에서 밤에 자고 있는데 아버지가 웬 춤추는 여자 사진을 가져온 거예요."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1911~1967)였다. 기생이나 춤을 춘다고 여기던 시절, 소녀 김백봉은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14세 때 진남포 최승희의 공연장을 찾아갔다. 동행한 아버지가 호적을 보여주며 '일본 아이가 아니라 조선 아입니다'고 했더니 최승희는 무척 기뻐했다. 그의 제자가 된 뒤 일본과 만주·중국 등에서 함께 공연하며 춤의 맥을 이었다.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었어요…." 스승을 보필하느라 지압과 빨래의 달인이 될 정도였지만, 최승희는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대신 스스로 깨닫게 하는 선생이었다. 1954년 발표한 부채춤에 대해 "사실 그건 훨씬 전에 만들었던 거였다"고 털어놨다. 월북한 최승희와 함께 고향인 평양에 있던 1940년대 후반 부채춤을 창작했는데, 그걸 본 최승희는 "무당춤 같으니 추지 마라"고 했다는 것이다. 김백봉은 "부채춤은 해가 뜨고 지는 것, 인생의 윤회와 영생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1·4 후퇴 때 남쪽으로 온 김백봉은 무용극 '심청' '춘향전' '우리 마을 이야기'를 발표하며 한국 신무용의 초석을 다졌다. 1971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무용가로서의 삶이 끝날 위기에 빠졌다. "어느 날 밤 한남동 길을 걷는데 내 손이 저절로 하늘로 올라가더라고요." 그 몸짓에서 '청명심수'(1974)란 걸작이 탄생했다. "마음에서 우러나 스스로 즐기는 춤, 그 마음속에 철학이 깃든 춤만이 제대로 된 춤이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이번 공연에선 40주년을 맞은 '청명산수'와 1950년대 초연된 그의 작품 '선(線)의 유동(流動)' '광란의 제단', 검무 '섬광' 등이 다시 공연된다. 제자들이 함께 무대에 설 것을 청하고 있지만 "연습 없이 춤을 춰서야 되겠느냐"며 계속 고사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