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희정 (드라마 이야기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걸어갈 길을 선택하지만,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님을 알 때까지 수많은 헛걸음을 내딛는다. 「미생」(tvN)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표정도, 옷차림도, 걸어가는 방향조차도 일사분란 하리만치 나와는 정반대였던 사람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철이든 이후엔 한 번도 속해본 적 없던,
그들 속에 섞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보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
결국 나는 여전히 혼자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거다.
이곳에서도 나는 변함없이 혼자였던 거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아는 그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다.
저런 암묵적인 일사분란함은 무엇을 얼마나 나눠야 가능한 것일까.

장그래는 바둑신동이었다. 프로기사가 되지 못한 스물여섯의 그래는 세상이 원하는 어느 것 하나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외국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며, 배경이 되어줄 인맥이 막강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고졸검정고시 출신이다. 바둑신동이던 시절의 후견인 덕분에 대기업 인턴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다. 몇 달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도태될 것이라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 미세한 온도 변화 하나까지도 알아서 조절해 주는 최첨단 현대식 빌딩, 오가는 사람들 목에는 자기들만의 인식표인 사원증이 걸려있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위압적이어서 넘겨다볼 생각조차 품을 수 없었던 바로 그 곳의 일원이 된 그래.

길이 어디로 뻗어 있는 지, 어떻게 그 길을 가야 하는 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그 길을 ‘일사분란’하게 찾아가고 있었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바보가 되어가는 자신에게 그래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이렇게 멍청이처럼 있는 것이라 자책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볼 때 그 친구, 성취동기가 분명한 부류야.
니가 실력이 없으면 그걸 이용해서 자기가 돋보이려 할거구,
니가 실력이 좋아도 그걸 이용해서 자기가 돋보이게 할거구.
성취동기가 강한 사람은 토네이도 같아서 주변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주지.
하지만 그 중심은 고요하쟎아. 중심을 차지해.

사사건건 동기들에게 이용당하는 그래를 보며 오과장은 정글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죽거나 죽이거나. 회사는 그런 곳이다. 원칙에 맞게, 서로가 약속한 방법대로, 진정성을 담아 열심히 일한다고 박수받는 곳이 아니었다.

때로는 검은 손과 끈적한 악수를 할 줄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장님처럼 옳은 것을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할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승승장구를 위해 남의 등 뒤를 덮치는 야비함도 겸비해야 한다. 그것이 정글이다. 그 법칙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은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오과장은 외로운 사람이다.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간다는 거니까.
넌 잘 모르겠지만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든, 생활자금을 벌기 위해서든 회사원이란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의미있는 존재이다. 능력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실패할 수도 있다. 예측을 잘못할 수도 있다. 실패를 거울삼아 동일한 실수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사적인 욕심이 발동하여 개인의 주머니를 불리고, 직무와 관련된 권한을 자신의 권위 과시용으로 악용하지만 않는다면 이로움을 추구한다는 공동의 목표아래 그들 모두는 한 식구이다.

미생(未生)인 삶, 사석(死石)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은 내 안에 있다.

◆공희정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테순이’라 불릴 만큼 텔레비전과 친하게 지냈다. 내 인생 최고의 TV 드라마는 (김수현 작)이고, 라디오 드라마는 김자옥의 이었다. 드라마 속에 세상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고 믿는 드라마 열혈 시청자. 지금은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