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 퉁지 의과대학에 다니던 스무 살 유진동(1908~?)은 졸업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가 백범 김구의 주치의이자 동지가 됐다. 1940년 중국 여성과 그곳에 신혼살림을 꾸리고 아랫집에 사는 김구 선생을 모셨다. 결혼식 주례를 선 것도 김구였다. 일본군 충칭 폭격 때 그와 김구 선생은 흙집 속에서 목숨을 건졌다.

광복군 사령부 군의처장과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낸 유진동은 해방 후 중국에 가족을 두고 백범과 함께 귀국했다가 1년도 안 돼 중국으로 돌아왔다. 가족에겐 "서울에 당과 파벌 간 투쟁이 몹시 극렬하니 중국에 머물면서 때를 지켜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서도 임시정부 활동 전력 때문에 직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때 백범 암살 소식이 들려왔다. 유진동은 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갔다.

백범 김구 선생의 주치의이자 독립투사였던 유진동 선생의 아들 유수동씨가 14일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당시 백범과 부친이 함께 찍었던 사진 자료 등을 들어 보이고 있다.

광복절을 앞둔 14일 유진동 선생의 아들 유수동(59)씨가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 걸린 임시정부 요원들 사진 앞에 섰다. 사진 속 김구 선생과 함께 한 이가 유진동 선생이다.

그가 두 살 때인 1957년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경성군에 정착했다. 북한행은 비극을 낳았다. 가족을 떠나 평양 병원에서 요양하던 아버지는 행방불명됐고, 아버지를 찾아 평양에 갔던 형은 고문을 당해 실성했다. 유씨는 "북한을 택한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아버지도 숙청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 왕팡씨는 자녀 여섯을 데리고 1963년 탈북, 충칭으로 돌아왔다. 중국 국적인 유씨는 가죽공장·전자회사에서 평생 일했다. 그는 1993년부터 한국정부에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했다. 어머니는 1997년 "끝까지 아버지 명예를 찾아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아버지 명예회복에 나선 지 14년 만인 2007년 8월 한국 정부는 유진동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지난 11일 중국 국적인 아들 유씨에게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그는 "스스로 늘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에 십수년간 끊임없이 한국의 문을 두드렸다"고 했다. 유씨는 "내가 국적을 획득한 것은 아버지와 나의 인생이 국가의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라며 "아버지가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이 인생 최대 목표였다"고 했다.

유씨는 "광복절은 우리 아버지가 평생을 분투해 얻은 날이고, 그동안 꿈꿨던 한국인이 된 제게도 광복의 날인 셈이다"라며 웃었다. 유씨는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 그는 "한국에서 아버지의 명예를 알렸으니 북한에 남겨진 아버지의 유해를 돌려받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