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새빨간 명함과 함께 악수를 건넬 때 흠칫하고 말았다. 갸름한 얼굴 흰 피부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영화에서 검시관(檢屍官)으로도 출연한 얼굴이다. “공포는 인간 근원의 비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공포만화의 거장 이토 준지(伊藤潤二·51)가 말했다.
제18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해외 초청 작가로 방한해 서울에서 첫 전시회를 연 이토 준지를 22일 서울 남산동2가 재미랑에서 만났다. 그의 전시회는 재미랑 근처 한 지하 주차장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장 내에 조명이 없어 랜턴을 들고 들어가야 한다. 어둠 속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공포의 물고기' 속 가쁜 호흡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관객의 비명이 섞인다. 만화에 귀신은 없다. 모두 인간에 대한 얘기다. "까마귀 시체를 걸어놓으면 까마귀가 다 도망간다는 얘길 들었어요. 우린 인간이니까 인간의 몸이 망가지면 가장 무섭죠."
그는 극단을 추구한다고 했다. "엄청나게 추하거나 혹은 아름다운 걸 그리고자 해요. 평범한 건 재미없어요. 얼마나 기괴하고 미학적으로 그릴 수 있을지 생각하면 막 떨립니다." 그는 인간의 입안을 궁리하는 사람이었다. 만화가가 되기 전 치기공사로 6년 정도 일했다. 그의 만화엔 입에서 손발이 튀어나오거나 찢어지는 듯한 형태의 구강이 자주 등장한다. "제가 말을 잘 못해요." 준비한 대답지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의문' '초자연'과 같은 일본어를 발음하며 입을 움찔했다. 그를 한국에서 스타로 만들어준 '소용돌이'를 얘기할 때였다. 사람이며 집이며 모든 게 소용돌이 모양으로 변하는 저주에 걸린 마을에 대한 만화다. "고대 유적에도 소용돌이 문양이 간혹 나오죠. 오래된 신비라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그 저주의 신비를 밝혀내진 못해요. 무한대의 무늬니까요."
그의 일생은 공포만화로 점철돼 있다. 유치원 때부터 공포만화를 봤고, 초·중·고교 내내 사형수가 등장하는 만화를 그려댔다. 그리고 2006년엔 일본 요괴 전문 일러스트작가와 결혼하며 화룡점정했다. 얼핏 그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아내 같아 보였다. "독신이었을 땐 내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는데, 요샌 살림도 도와야 하고 만화 외적인 일도 많아졌어요." 결혼 후 4년 뒤 처음으로 고양이를 소재로 한 코믹 만화('이토 준지의 고양이일기 욘&무')도 그렸다. "아내 때문에 고양이를 키우게 됐는데, 생각보다 재밌더군요."
데뷔 27년에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지만, 내 만화는 아이디어에 승부를 거는 쪽이라 아무래도 힘이 든다”고 했다. “젊었을 땐 손도 별로 안 아팠는데, 나이를 먹긴 먹은 것 같다”는 푸념도 한다. 악수를 나눴다. 손이 따뜻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