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개봉한 ‘굿모닝 맨하탄(English Vinglish)’은 웰메이드 발리우드 영화다. 원제의 ‘빙글리시’는 그저 리듬을 위해 사용한 단어다. 인도에는 ‘콩글리시’처럼 힌두어와 잉글리시를 합친 ‘힝글리시’라는 속어가 있긴 하다.
‘발리우드’는 잘 알려졌다시피 인도 영화산업의 중심지인 최대도시 봄베이(뭄바이의 옛 영어지명)와 할리우드의 합성어다. 할리우드를 능가하는 영화 제작편수와 한때 세계1위의 영화 관객수를 자랑하던 발리우드의 명성은 예전보다 못하지만 흥겨운 뮤지컬적 요소와 ‘마법’ 같은 치유능력으로 해외 관객들까지 사로잡는다. 2011년 국내 개봉한 ‘세 얼간이’(2009)를 재밌게 본 이들이라면 ‘굿모닝 맨하탄’ 역시 취향에 맞으리라 여겨진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 왠지 주눅이 드는 인도의 현실은 한국과 다르지 않고, 중요하지만 줄곧 잊혀지기 쉬운 가정 내 어머니와 아내의 위상을 일깨운다는 점에서도 가부장적 보수주의가 남아있는 우리 사회가 비쳐 보인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동양적 정서도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90년 동안 영국식민지였던 인도는 힌두어와 함께 영어가 공용어로 쓰이는데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은 아무래도 영어가 서툴게 마련이다. 인도식 디저트인 라두를 만들어 팔정도로 음식솜씨도 뛰어나고 아름다운 가정주부 샤시(스리데비)는 영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 사티시(아딜 후세인)과 10대 딸, 어린 아들에게까지 종종 무시를 당한다. 뉴욕에 사는 조카의 결혼준비를 돕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홀로 미국으로 떠나게 된 샤시는 남몰래 영어학원에 다니기로 결심한다. 각본과 감독을 맡은 가우리 신드(40)는 CF감독 출신의 여성감독으로 ‘굿모닝 맨하탄’이 장편데뷔작이다.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야기다. 감독의 어머니는 고향 푸네에서 피클 가내 사업을 했지만 마라시어로만 말하고 영어에는 능숙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려서 이를 부끄러워한 신드 감독은 “어머니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인터뷰했다.
인도에서 영어가 상용어로 쓰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넓은 땅덩어리만큼 많은 언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힌디어 빼고도 무려 18개 언어가 사용된다. 콜리우드(타밀 영화단지), 톨리우드(텔루구 영화단지), 마라티 영화단지, 뱅갈리 영화단지, 칸나다 영화단지 등 각 지역에서 다양한 언어로 영화가 제작되고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전에는 화면 네 구석에 모두 여러 가지 언어로 자막이 어지럽게 넣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은 해당언어로 리메이크하는 것을 선호한다.
지난달 인도를 국빈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과거와 같은 날(8월15일) 독립을 쟁취한 공통경험을 가졌다”고 강조한 것처럼 인도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지배계층은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지금도 과학기술교육이 거의 영어로 이뤄지다 보니 대졸자들은 대개 유창하게 영어를 쓴다. 통용되는 것은 현지화된 영어다. 액선트도 바뀌고 발음, 뜻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미국식 발음을 흉내내려고 노력하는 한국인들에게 “아직도 식민지 시대를 사느냐”고 비웃은 인도인들도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3년간 미군정 시기와 미군주둔의 잔재, 일반인의 해외여행이나 해외유학이 통제되던 시대를 보내며 한국민에게도 영어 콤플렉스가 깊숙이 자리 잡았다. UN 공식언어가 영어가 아니라 ‘브로큰 잉글리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국식과 미국식 영어도 다르다. 그럼에도 EBS에서 블라인드 테스트 해보니 원어민들도 수준 높다고 칭찬하는 반기문 UN사무총장의 영어를 촌스럽다고 하는 한국인들도 있는 현실이다.
2012년 10월 인도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이듬해 홍콩에서 ‘세 얼간이’에 이어 가장 흥행에 성공한 인도영화 2위를 차지했다. 같은 영국식민지 경험을 갖고 영어가 중국어(광둥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이는 홍콩인들이 공감할 요소가 그만큼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샤시의 입장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감정이입이 잘되도록 자잘하고 세세하게 꾸며졌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서 홀로 해외여행, 특히 미국에 가게된 사람 누구나 겪을만한 상황들이다. 현지 미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으러 가서도 영어 질문에 답해야하는 모욕감을 느낀다. 출국심사 때도 힌두어로 된 서류는 없으며, 비행기에 물이나 음식이 반입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라 헤맨다. 미국 입국심사도 몇 번이나 연습을 해야 할만큼 심장 떨리는 일이다.
영어 대화에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는 커피주문도 제대로 못해 울적해진 샤시는 ‘4주 영어완성’이라는 버스광고판을 보고 맨해튼의 영어학원에 등록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극중 ‘뉴욕랭귀지센터’가 실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화에 장소제공을 하면서 엄청난 광고효과를 누렸다.
동성애자인 데이비드 피셔(코리 힙스)가 담임인 반에서 샤시는 멕시코에서 와 유모로 일하는 에바(루스 아귈라), 택시드라이버로 일하는 파키스탄 출신의 살만 칸(수미트 뷔아스), 해외취업한 인도인 라마무티(라지브 라빈드라나단), 미용사인 동양인 유선(마리아 로마노), 흑인인 우둠브케(데미안 톰슨), 그리고 커피를 살 때 우연히 도움을 줬던 프랑스인 요리사 로랑(메디 네브부)과 함께 영어를 배우게 된다. 엇비슷한 수준의 수강생들과 배움의 즐거움을 한껏 느끼며 친구가 된다. 사소한 일화들이 알콩달콩 재미를 준다.
순진한 가정주부 샤시가 요리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외간남자 로랑의 관심에 흔들리게 되는 것이 긴장을 몰고 온다. 자신의 본분을 고민하면서 영어학원에 가는 것으로 스스로를 확인받으려는 샤시의 시도는 나중에 합류한 남편과 갈등을 빚게 되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낙천적 해피엔딩을 맞는다는 점에서는 여느 발리우드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계급차와 남녀차별이 엄연한 인도에서 이 같은 영화기법은 사회불만을 잠재우는 기능을 한다는 분석도 있다. 억지스럽지 않은 교훈적 결말로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 것이 장점이다. 뉴욕 풍광과 인도식 결혼식 장면, 샤시가 계속 바꿔 입고 나오는 아름다운 전통의상 사리 등 볼거리도 풍부하다. 역시나 유쾌한 음악과 춤이 빠진다면 인도영화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뮤지컬적 요소는 영화 자체의 리듬감과 함께 호소력을 더한다.
샤시의 마지막 연설은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진리를 상기시키며 감동을 준다. “결혼은 아름다운 일이고, 두 사람이 동등하게 우정을 쌓는 일이며,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서로 도와야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덕담은 연이은 집단 성폭행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 인권이 바닥을 치는 인도에서는 더욱 뜻깊게 느껴질 만한 주제다. 또 하나의 깨달음은 결국 영어를 배우는 것도 의사표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언어를 넘어서도 감정과 진심은 통한다. 콘텐츠가 없는 표현수단이란 ‘영혼 없는 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