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일 밤, 염수정 추기경님이 임명됐다는 소식에 우선 기뻤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큰 경사이잖아요. 그다음 순간, '아, 옷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3일 오전 서울 강북구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 완성 직전인 염 추기경의 진홍색 수단(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사제복)을 어루만지며 양 마리나 수녀가 말했다. 염 추기경은 22일 바티칸에서 열리는 서임식에 한국의 수녀들이 한 땀 한 땀 정성껏 지은 이 옷을 입고 참석한다. 김수환 정진석 추기경도 이 수녀회가 만든 옷을 입었다.
염 추기경의 임명 발표 직후부터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 수녀들은 숨 가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임명 다음 날 염 추기경을 방문해 신체 치수를 잰 것을 시작으로 패턴에 맞춰 재단과 가봉을 마쳤고 이번 주까지 진홍색 수단을 완성해 오는 8일 추기경 비서실에 보내야 하기 때문. 추기경을 상징하는 진홍색 천은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로마에 주문해 받아놓았었고, 정해진 복식에 따라 단춧구멍 하나하나까지 마무리에 세심한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 한국관구장 권 마리아 잔나 수녀는 "우리는 2선(線)에서 일하는 수도자들"이라고 했다. 천주교의 여러 수도회마다 지향이 다르지만 복자(福者) 야고보 알베리오네(1884~ 1971) 신부가 1924년 설립해 1965년 한국에 진출한 이 수녀회는 미사를 비롯한 천주교의 전례(典禮)에 쓰이는 의복과 제구(祭具) 등 각종 용품을 제조해온 것으로 잘 알려졌다. 미사를 통해 신자들 눈에 보이는 전례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하는 수녀들인 셈이다. 그중에서도 추기경, 주교, 사제, 신학생들이 입는 수단과 제의(祭衣) 등 전례복이 대표적. 작년만 해도 전국 사제 300여명이 이 수녀회가 만든 옷을 입었다. 새벽 5시에 기상해 밤 10시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하루 8차례 기도를 드리며 틈틈이 지은 옷들이다. 최근엔 재봉틀 작업도 병행하지만 여전히 공정의 많은 부분에 손바느질을 고수하는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가 만든 옷은 외국의 주교들도 한국을 방문할 때 맞춰 입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수녀원 2층과 3층, '침묵, 단순, 민첩'이란 표어가 붙어있는 작업실에는 수녀 10여명이 작업 중이었지만 '사각사각' 바느질 수놓는 소리와 재봉틀 소리만 들렸다. 녹색 제의에 금·은색실로 십자가를 수놓고 있던 한 수녀는 "20년 이상 늘 기도하면서 수를 놓아왔다"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일반 가정에서도 손바느질로 옷을 지어입는 경우가 거의 사라진 지금, 수도자가 되어 바느질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15년째 사제들의 옷을 짓느라 손끝에 굳은살이 박인 양 마리나 수녀는 "사회에서는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바느질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며 "성모님의 마음으로 사제들을 위한 옷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은총"이라고 말했다. '2선에서 일하는 수도자'라는 말처럼 이렇게 정성 들여 만든 옷을 본인들에게 전달하고 나면 수녀들의 몫은 끝이다. 그다음은 기도. 양 마리나 수녀는 "사제들이 저희가 만든 옷을 입고, 그리스도를 입듯이 착한 목자로 살아가도록 기도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