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간첩으로 對日 강경책인 '헐 노트'를 작성한 해리 덱스터 화이트.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 영웅' 칭호를 받은 적이 있는 러시아의 작가 블라디미르 카르포프는 2000년에 는 요지의 글을 썼다. 그는 고 주장했다. 소련은 화이트를 조종, 당시 재무장관 모겐소를 통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본을 자극, 미국을 공격하도록 하는' 건의서를 쓰게 했다는 것이다.

소련 정보기관은 화이트의 이름을 빌려 이 작전을 '눈 공작'(Operation Snow)라고 불렀다. 소련이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을 유도하려 한 것은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면 소련을 공격할 자원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외교 안보 정책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를 발간하는 미국의 권위 있는 '외교협회'의 국제경제담당 국장 벤 스틸이 올해 쓴 《브레튼우즈의 전투》라는 책에 카르포프의 글이 인용되었다.

이 공작의 주인공은 당시 27세이던 소련 공작원 파블로프였다. 1941년 봄에 그는 워싱턴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미국 공산당원이자 미국 내 소련 간첩망의 요원이던 휘태커 체임버스를 통하여 꾸준히 정보를 제공해 왔던) 화이트를 활용하는 일이었다. 파블로프는 1996년에 자신의 체험담을 《눈 공작》이란 책으로 출판하였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화이트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실력자이던 모겐소 재무장관의 최측근으로서 국제경제 담당 국장이었는데, 외교문제에 대한 자문도 했다. 당시 화이트는 미국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소련 간첩망의 일원도 아니었다. 그는 자진하여 미국 정부의 고급 문서와 정보를 소련에 넘겨주는 간첩질을 한 사람이다.

고노에 내각이 미일 교섭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辭職)하고 일본 육군상(陸軍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대장이 1941년 10월 18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천황은 도조에게 "9월 6일 어전회의 결정에 구애받지 말고 내외(內外) 정세를 재검토하여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하였다. 일본 정부와 대본영은 11월 2일 "무력발동 시기를 12월 상순으로 정하고 마지막 대미교섭을 시도하며 독일 및 이탈리아와 제휴를 강화한다"고 결정하였다.

11월 7일부터 주미일본대사와 코델 헐 국무장관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외교 전문(電文)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군이 인도차이나에서 부분적으로 철수하면 대일석유수출 금지 조치를 일부 해제한다는 내용이 들어가는 등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려는 모습이었다. 11월 10일 노무라 대사를 만난 루스벨트 대통령도 잠정협정을 맺을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 국면에서 재무부의 소련 간첩 화이트가 등장한다.

헐 국무장관이 대일 제안 내용을 작성하고 있을 때인 11월 17일 화이트는 모겐소 재무장관에게 이란 제목의 긴 메모를 전달하였다. 모겐소는 이를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장관에게 전달하였다.

이 메모에서 화이트는 중국으로부터 일본군 철수, 장개석 국민당 정권을 제외한 다른 중국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일본에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메모는 국무부와 육군성 등이 협의, 대일 제안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기초 문서가 되었다. 헨리 스팀슨 육군장관은 "너무 과격한 내용이라 일본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화이트는 자신의 강경한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친소적(親蘇的) 인사를 동원, 협조를 요청하는 등 열정적으로 소련의 이익을 위하여 뛰었다.

헐 장관은 타협적인 잠정 협정안과 강경한 포괄적 해결안 두 개를 준비하였는데, 후자(後者)에 화이트의 주장(즉 모겐소의 주장)이 거의 반영되었다. 포괄적 해결안을 역사학자들은 '헐 노트'라고 부르는데 모겐소안이 그 원형(原型)이라고 본다.

11월 26일 루스벨트는 잠정안을 버리고 강경한 포괄적 해결안, 즉 '헐 노트'를 일본에 건네도록 결정한다. 이날 저녁 헐 노트를 통보받은 일본 특파 대사 구루수는 "일본 정부가 이 제안을 읽으면 교섭을 중단할 것이다"고 반응하였다.

'헐 노트'를 읽은 도조 일본 수상은 "이제 남은 길은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전쟁밖에 없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도조는 '헐 노트'를 최후통첩으로 이해하였다. 12월 1일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미국, 영국,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공격을 승인하였다. 다음 날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진주만을 향하여 접근 중이던 항공모함 중심의 기동부대에 12월 8일(일본 시각)을 기하여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8년 여름 소련 간첩질을 하다가 전향한 두 사람(벤틀리와 체임버스)이 미 하원의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에서 화이트, 히스 등 소련 간첩들의 명단을 폭로하였다.

화이트는 8월 13일 이 위원회에 호출되어 증언하였다. 35세의 신참 하원의원인 리처드 닉슨은 화이트를 위증죄(僞證罪)로 걸기 위하여 간첩 체임버스를 만난 적이 없다는 거짓말을 이끌어내려 했다. 화이트는 '만난 기억이 안 난다'는 말로 피해 나갔다. 이날 증언에서 화이트는 밀리지 않았으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다음 날 그는 뉴햄프셔주에 있는 별장으로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심장발작을 일으켜 이튿날 사망하였다. 미 하원 조사위원회는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0년 1월 26일 닉슨은 조사위원회에서 결정적인 폭로를 했다. 화이트가 소련에 포섭된 간첩이던 체임버스에게 넘긴 8페이지 문서의 사본(寫本)을 제시한 것이다. 체임버스는 화이트와 히스가 소련 정보기관에 넘겨주라고 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화이트가 소련에 제공한 문서들은 손으로 쓴 것인데, 고급 비밀이 많았다. 군사 및 외교 분야의 문서들이 주였다. 국무부와 재무부에서 생산된 정보와 이에 대한 화이트의 논평들이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2014년 1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