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곰 펴냄)를 읽고, 류근(柳根·47) 시인 만날 생각을 했다. 지난해 동인문학상을 받은 또래 소설가 정영문은, "그 사내를 조심하라"고 했다. 만나면 무박 3일 줄기차게 술마시는 폐인이고, '3류 트로트 통속 연애 시인'을 자처하는 상처 투성이 사내라고 했다. 시인 남진우는 그의 시를 '뽕필의 미학'이라고 불렀다.
정영문은 "그 사내를 조심하라"고 했다
문학 울타리 바깥에서, 그는 대중가요 노랫말도 썼다. 그 중 하나가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과 2010년 첫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사이에는 18년의 공백이 있다. 문단 바깥의 18년 동안, 벤처기업 창업과 성공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이 폐인 주변을 돌아다녔다. 음주 인터뷰를 예감하며 시인을 찾았을때, 그는 허리와 오른손의 대형 상처를 보여줬다. 문학과 돈과 영혼의 상처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먼저. 육체의 상처부터 물었다.

류근 시인은 서울 오산고 출신.“ 이래 봬도 소월, 백석과 함께 오산이 낳은 3대 시인”이라는 게 자칭‘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 시인’의 호연지기다. 이진한 기자

―어쩌다가.
"절에서 개에게 물렸다. 어머니 2주기 때문에 찾은 참이었다. 절에서 키우는 개는 건방지다. 스님에게만 꼬리치고, 일반 신도는 우습게 안다. 응급실까지 다녀왔는데, 덕분에 '개물린 시인' '개보다 못한 시인'이 됐다."

허리와 오른손의 대형 상처는

―3류 트로트 통속 시인을 자처하는 이유는.
"내가 3류니까. 사람의 본성은 안바뀐다. 하지만 3류일지언정, 남들과 비슷한 아류(亞流)는 거부한다."
―통속의 힘은 뭐길래.
"통속은 세상과 통하자는 것. 우리는 속세에 살고 있다. 클리셰(상투적 표현)를 혐오하는 사람 많은데, 그 놈들이 더 통속적이면서 뭘 그래. 현실은 그보다 더 속되지 않나. 문학판에서 누가 '당신 시는 쉽잖아' 하고 조롱하듯 말하더군.

류근 시인은 "떼돈 번적 없다"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래, 어려운 시는 니들이 써라. 쉬운 시는 내가 쓸테니. 진심이다."
신춘문예 등단 후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을 모아 시집 내는 관행과 달리, 그는 한 권 분량을 한꺼번에 투고했고 심사에 통과해 시집을 냈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문지'로서는 예외적인 일이었고, 그 시집은 지금까지 7쇄를 찍었다. 초판 소화도 버거운 최근 분위기에서는 역시 예외적 일이다. 상처와 허무, 퇴폐와 통속을 '아름다운 엄살'로 함께 앓는 것이 이 폐인의 문학이 지닌 힘. 시 '어떤 흐린 가을비'의 일부다.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 흐린 비 온다/ 자주 먼 별을 찾아 떠돌던/ 내 노래 세상에 없다/ 한때 잘못 든 길이 있었을 뿐// 붉은 간판 아래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같은 추억이/ 지나간다 이마를 가린 나무들/ 몸매를 다 드러내며 젖고/ 늙은 여인은 술병을 내려놓는다//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슬픔의 자세를 보여주는/ 나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신다/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이하 생략)
윤선애 새음반을 위한 곡이 김광석 노랫말로
―김광석 노랫말을 쓴 사연은.
"중대 문창과를 다니다 군대를 갔는데, 정말 처절하게 가난했다. 휴가를 나와도 갈 곳이 없었다. 집안은 풍비박산, 둘째 형 집에서 어머니가 얹혀 살 때였다. 나는 6남매중 막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했다. 제대 후에는 옛 애인들이 밥값, 술값, 잠자리까지 해결해줬다. 하지만 등록금까지 내달라 할 수는 없지 않나. 그 때 후배가 등록금 벌 아르바이트가 있다고 했다. 마감이 급하다고 해 하룻밤에 노래가사 29개를 썼다. 원래는 ('그날이 오면'을 부른 민중가수) 윤선애의 새음반을 위한 곡이었는데, 여러 사연으로 김광석 형이 부르게 됐다."

―김광석이 아버지보다 낫다고 했다면서.
"2011년에 가입료 10만원 내고 저작권 협회에 가입했다. 가입료가 너무 세다 싶어 그 돈으로 술이나 먹으려고 했는데, 후배가 강제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첫달에 28만원이 들어오더니, 둘째 달에는 30만원 넘게 들어왔다.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건, 군에 있던 나를 위로 휴가 보내주신 것 밖에 없다. 그 때 돌아가셨으니까. (껄껄 웃으며) 그러니, 아버지보다 김광석이 낫지."

류근 시인은 "윤선애 새음반을 위한 곡이 김광석 노랫말이 돼버렸다"고 했다.

떼돈 벌고 수백억 자산가라는 소문은 정말 소문

―떼돈을 벌었다는 소문은.
"젊었을 때 대기업 홍보실을 다녔다. 문창과 나왔다는 이유로, 곧 부도나게 생긴 회사를 그렇지 않을거라고 보도자료 만드는게 업무였다. 문학 배운놈이 거짓말만 일삼고, 안되겠다 싶어 때려치웠다. 재형저축 깨서 그 돈으로 평생 소원이었던 인도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횡성에서 고추 농사 짓고 있는데, 예전 그 회사 동료가 제안을 했다. 휴대폰 벨소리 다운로드 사업을 해보자고. 당시에는 그런 개념조차 없을 때였다. 믿을 수 없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대박이 났다."
―수백억 자산가라던데.
"4000억 벌었다는 소문은 못 들었나? 어처구니가 없다. 돈 조금 벌었다는 소문 난 뒤, 상처 많이 입었다. 친구의 형까지 찾아와서 무조건 돈 빌려달라, 너는 밤에 룸살롱 다닌다면서 나는 왜 꽃등심밖에 안사주느냐, 이런 식이었다. 사업은 적성도 맞지 않았고, 더 잘할 자신도 없었다. 동업자와 합의하고, 회사 정리한 뒤 7년전에 그만뒀다."
―강호에 유례 없는 '부자 시인'. 스스로 모순은 없나.
"내 나이 서른다섯에 기사 딸린 리무진도 타 봤다. 그런데 늘 불안한거다. 신데렐라 유리구두를 타고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스스로 해결이 안되는 인간이다. 그런데 예전에 없던 모순까지 생겼으니, 더 힘들었다. 그나마 할 줄 아는 건 술마시고 글쓰는 일 밖에 없다. 윤동주 선생에게 부끄럽지만,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쉽게 쓰여진 시' 부분), 어쩔 수가 없어서 쓸 뿐이다."
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에는 사실 사용설명서가 필요하다. 이 안에는 '부자 류근'이 아니라, '폐인 류근'만 있다. 그의 모순을 혐오하는 독자에게는 자칫 위악과 가식으로 읽힐 위험도 다분하다. 하지만 그는 비애와 더불어 살고 있는 낭만적 폐인. 문학을 꿈꾸는 투정과 고백이 이 안에 있다.

류근 시인은 집에서 안챙겨주면 남들에게 뺏어서라도 술먹고 담배필 종자(種子)라는 것을 알았다. 이진한 기자

편집자 레터

시인 류근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부자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가난하다는 명제가 당연한 진리인 것 처럼 여겨지는 세상. 부자도 시인이 될 수 있고, 또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논현동 집에서 그를 만났을 때, 시인은 부자가 된 지금도 내게 새겨진 '빈곤 기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가 말한대로 청소년기의 '극빈'이 체질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류근이 가장 소망했던 일은 돈보다 시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불량소년 류근, 그리고 그 소년이 지닌 문학에의 순정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의 에피소드인데, '바른생활 소년'으로 평생을 일관해온 모범생들은 발벗고 뛰어도 다가갈 수 없는 경지더군요. 한 번은 학교에서 담배를 피다가 걸렸는데, 선생님이 "담배 피는 다른 친구들을 불어라"고 했답니다. 류근은 명색이 '당대의 문사(文士)'인데 그럴 수는 없다고 거부했고, 필드 하키 채로 두들겨 맞았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등교를 거부한다고 선언하죠. 이 대목에서 어머니가 나섭니다. "고자질 안한다고 때린다니, 이게 무슨 교육이냐. 우리 애 학교 안보내겠다."
오히려 학교에서 반성문을 썼다죠. 이후 고등학생 류근의 어머니는 학교에 싸보내는 도시락에 늘 담배 7~8가치를 넣어 주었답니다. 심지어 집안 형편이 어려워 텔레비전을 전당포에 맡기더라도, 그 돈으로 류근 술값과 담배값은 찔러줬다는군요. 믿어지십니까. 담배 피는 아들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마치 간식처럼 챙겨보내다니요. 더구나 그 어머니는 류근의 형님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무서운 모친이었다는데요.
시인의 고백으로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어머니의 배려였답니다. 집에서 안챙겨주면 남들에게 뺏어서라도 술먹고 담배필 종자(種子)라는 걸 아셨다는거죠. 그 어머니가 2011년에 돌아가셨답니다. 자신을 만든 건 결국 어머니였다는거죠. 어쩌면 이 글은 문학 내부보다 문학 바깥의 독자가 읽어줬으면 하는 바램이 제 무의식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페이스북 스타입니다. '페북 프린스'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는군요.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는 페이스북에서 왕자로 군림하고 있는 시인의 활약을 모은 글이기도 합니다. '페북 프린스' 류근, 부자 시인 류근의 순정이 변치 않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