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 한·러 정상회담에 30분이나 지각하고 방한 일정도 수시로 변경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정상회담과 환영오찬 등 대부분 일정이 줄줄이 연기됐다.
한국과 러시아는 지난 1일 푸틴 대통령이 12~13일 1박2일간 방한한다는 일정에 합의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지난 4일 돌연 12일 방한이 힘들다며 일정 변경을 요청했다. 이틀간 순방을 13일 당일치기로 축소하자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는 정상회담 이틀 전인 11일에야 환영오찬 참석자들에게 오찬 시간을 통보했다.
러시아 측은 뚜렷한 일정 변경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은 13일 새벽 2시 50분 인천공항에 도착해 시내 호텔에 묵었다. 러시아 정부 관계자들은 한·러 경제인 모임에서 "태풍 때문에 늦게 도착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주(駐)베트남 한국대사관 측은 "태풍은 이미 11일 베트남을 지나갔기 때문에 비행 일정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 것"이라며 "베트남 순방 하루 동안 응우옌 떤 중 국가주석을 비롯한 정부 요인 4명을 잇달아 만나는 빡빡한 일정 때문에 출발이 늦어진 것 같다"고 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오후 1시 청와대에서 열리기로 돼 있던 정상회담에 30분 늦었다. 큰 외교적 결례다. 더구나 이날 지각한 것은 공식 일정에 없었던 '대한삼보연맹' 환영 행사 때문이었다고 한다. 삼보(SAMBO)는 러시아의 국기(國技)인 맨손 격투기로 푸틴 대통령이 국제삼보연맹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정상회담 예정 시각이 10분여 지난 오후 1시 10분쯤 롯데호텔에서 차를 타고 나가다가 환영 플래카드를 든 대한삼보연맹 임원과 선수들을 보자 차에서 내린 뒤 10여분간 일일이 악수·격려하며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우리 경호실은 이를 사전에 통보받지 못해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 대통령은 이에 앞서 '한·러 비즈니스 다이얼로그' 행사에도 깜짝 참석했다. 한·러 경제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설을 하고 싶다는 푸틴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급하게 잡힌 일정이었다.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 지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30분,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은 40분을 기다렸다. 작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40분을 기다렸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남 때도 15분 지각했다.
정상회담이 지연되면서 두 정상의 공동 기자회견도 오후 4시 5분에야 시작됐다. 그것도 앞서 박 대통령이 "오찬시간이 많이 늦어져 시장하실 텐데…"라며 확대정상회담 시간을 30분에서 10분으로 줄인 결과였다. 이어진 공식 환영오찬도 당초 예정보다 1시간 30분 늦은 오후 4시 45분에 시작돼 오후 6시에 끝났다.
만찬 같은 오찬이 돼 버린 것이다. 이후 일정인 한·러 다이얼로그 행사와 러시아 문호인 푸시킨 동상 제막식 등도 줄줄이 연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