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의 천국’(1991)과 ‘제8요일’(1996)로 각급 영화제를 휩쓸며 국제적 명성을 얻은 벨기에 감독 자코 반 도마엘(56)이 무려 13년 만에 ‘미스터 노바디’(2009)를 발표했다. 국내 개봉은 난항 끝에 24일로 결정됐다.

예전 작품만큼 큰 상은 받지 못했지만 반 도마엘 감독 상상력의 총체를 보여주는 ‘미스터 노바디’는 제23회 유럽영화상에서 관객선정 최우수 유럽영화상을 받는 등 관객들에게 더 주목받으며 ‘컬트영화’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장르적으로도 SF, 판타지, 멜로, 로맨스, 드라마가 뒤섞인 이 영화는 반 도마엘 감독을 천재라고 불러야할지, 아니면 광인 취급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해 한 두 번 봐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무려 2001년부터 준비해온 그의 첫 번째 영어 영화다. 난삽하다고 할만큼 시공간, 더 나아가 차원을 뛰어넘는 ‘패치워크’ 편집은 감독의 무의식을 헤집어 놓은 듯하다. 그 철학적 깊이와 지식, 초월적 구성을 다 따라잡는건 불가능하지만 그가 조각을 이어붙여 펼쳐놓은 세계가 감탄을 자아내는 것만은 사실이다.

대략 줄거리를 추려보자면 이렇다. 2092년 미래, 마지막 자연노화 생존자로 ‘인류 최후로 늙어 죽는 자’로 기록될 118세의 니모(재리드 레토)는 의사와 자신을 취재 온 기자에게 띄엄띄엄 과거를 얘기한다. 기억이 오락가락할 만한 나이다. 그가 들려주는 얘기는 하나도 앞뒤가 맞지 않고 무작위로 튀어나오는 추억의 조각일 뿐이다. 이야기의 모든 전제는 ‘만약’이라는 가정이다. ‘그때 만약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흔한 상상을 적용, 계속 되돌이켜 다른 전개로 이어가는 것이다. 감독의 몽상 내지 망상을 이어 붙였을 뿐인데 묘한 아우라를 자아내는 작품이 탄생했다. 아홉살 니모가 기차역에서 헤어지는 엄마와 아빠 중 한 명을 선택하는 순간 인생이 두 갈래로 갈리고, 엄마를 따라간 15세 니모는 평생의 사랑 애나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또 갈린다. 아빠와 남은 15세의 니모는 앨리스와 진을 선택하는 갈림길에 놓이며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다. 34세의 니모는 더 다양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애나를 찾아 헤매는 수영장 관리인이 된 니모, 짝사랑하는 앨리스와 결혼한 복사기 회사 직원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해 우울증에 걸린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기는 니모, 결혼식 날 불의의 사고로 앨리스를 잃고 화상을 입은 채 과학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는 니모, 사랑하지 않는 진과 결혼한 유복한 사업가가 된 니모…. 자동차를 탄 채 강물에 빠져 죽을 위기를 맞기도 하고 가까스로 탈출하기도 한다. 욕조 안에서 총을 맞아 죽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아니면 세포재생술로 늙지 않은 채 화성여행을 하며 약속대로 앨리스의 유골을 뿌려주고는 빅크런치를 연구하는 애나와 우연히 만났으나 운석의 충돌로 죽음을 맞기도 한다. 부모가 나비이론에 의해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예 선사시대 한 여인의 죽음으로 혈통이 끊겨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118세의 니모의 회상일 뿐만 아니라 9세의 니모가 펼친 상상이기도 하고, 15세의 니모가 쓴 소설이기도 하다. 무수히 분화하는 세포처럼 아마 무한대의 갈래 길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억지로 퍼즐을 맞춰 니모가 존재하는 평행우주의 숫자를 세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체크무늬로 이뤄진 니모의 무의식, 혹은 판타지의 세계까지 더해져 더 엉키게 마련이니까.

기억의 문제 뿐 아니라 심리학 비롯해 생물학, 천체물리학 등 과학이론을 끌어들여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도 흥미롭다. 비둘기 심리 이론부터 나비효과(카오스 이론), 빅크런치, 끈이론(다중우주론), 엔트로피 법칙 등이 중간중간 등장하며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인지, 진일보해 존재론적 질문도 던진다. 나비효과가 동양에서 시작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인생에 적용될 때는 불교 ‘업’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당신의 말은 다 모순 아니냐”고 따져묻는 기자에게 118세의 니모는 “어떤 삶이 맞는 삶일까? 이 모든 삶이 진짜고, 모든 길은 다 맞는 길이다. 모든 것은 다 달라질 수 있고, 더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선문답 같은 말을 남긴다. 이것이 질문에 대한 답일까,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주요 테마곡으로 흐르는 ‘미스터 샌드맨’의 가사를 음미해볼만 하다. 샌드맨은 유럽 설화에 나오는 ‘잠의 요정’이다. 모래를 뿌려 눈을 간지럽혀 잠이 오게 만들고 좋은 꿈을 꾸게한다는 전설이 있다. 1954년 발표된 후 여러차례 리메이크되며 유쾌한 리듬으로 사랑받아온 ‘미스터 샌드맨’의 가사와 ‘꿈’에 대한 몇몇 언급은 니모의 파란만장한 일생도 ‘일장춘몽’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이 뒤죽박죽 영화에 관객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을 해봤을 공상이 공감을 자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날 아침 문득 눈을 떠보면 언제 어느새 이렇게 나이 들어 버려 여기 누워있는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나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때 그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와 같은 생각을 해본다. 과거의 추억도 일대기처럼 체계적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이 팝콘 튀어오르듯 수면위로 떠오를 때가 있지 않던가.

이 엄청난 공력을 들인 짜깁기에서 문득문득 다른 영화의 향기를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래의 화성탐사 장면은 우주여행 영화의 고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여타 SF영화의 영향력 하에 있으며, 알록달록한 색채로 꾸며진 1970년대 유년기의 배경은 팀 버턴류의 판타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저 몽환적으로 아름답게 짜여진 한 편의 컬트영화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배우의 새로운 발견은 이 영화가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118세로 분장한 니모와 성인 니모 역의 미국 배우 재리드 레토(42)는 커다란 푸른 눈동자를 뽐내며 다양한 삶을 부지런히 연기해낸다. 15세 니모 역의 영국배우 토비 레그보(22)는 미소년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성인 애나 역을 맡은 모델 출신의 독일배우 다이앤 크루거(37)는 한결 성숙해진 연기력과 미모로 스크린을 채운다. 15세 애나 역의 영국배우 주노 템플(24)은 동안 외모로 도발적인 틴에이저의 사랑을 인상깊게 연기해낸다.

‘인도차이나’(1992)로 인지도 높은 베트남 여배우 린당 팜(39)이 성인 진 역으로 오랜만에 국내 팬들에게 선보인다. 1993년 한국 드라마 ‘머나만 쏭바강’에서 박중훈(47)의 상대역을 맡아 청순가련한 외모로 남성팬들을 설레게 만들기도 했다. 반 도마엘 감독의 전작 ‘제8요일’에서 주연을 맡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한 실제 다운증후군 환자 파스칼 뒤켄(43)이 잠시 얼굴을 비추는 것도 반갑다. 다운증후군 장애인의 평균수명을 고려했을 때 그의 건재는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