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돈 주세요."

금 한 돈 달라는 말이 아니다. 국산 돼지고기를 주문하는 소리이다. 근래에 양돈업계에서 국산 돼지 또는 국산 돼지고기를 한돈이라 부르고 있다. 관련 단체 이름도 여기에 맞추어 바꾸었다. 정부 문서에도 한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으로 보아 한돈은 국산 돼지 또는 국산 돼지고기의 이름으로 공식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기왕이면 국산 농수축산물을 먹자는 일에 딴죽을 걸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국산을 챙겨 먹는다. 한국인 사이의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신뢰는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지 국산이기만 하면 좋다고 애국심을 부추기는 일에만 열중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보통‘흑돼지’라고 하면 재래종 돼지라고 생각하지만 해외에서 유입된 품종과 섞인 교잡종이 대부분이다. 한 농가에서 흑돼지를 키우고 있는 모습. 흑돼지 중 영국 버크셔 품종은 쫄깃한 육질과 적당한 탄력으로 고기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다.

한돈은 한우의 이미지를 돼지고기에 연결하겠다는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키우는 소가 한우이니 한국에서 키우는 돼지는 한돈이다' 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키우는 모든 소가 한우는 아니다. 젖소도 있고, 육우도 있다. 시장에서는 이를 분류하여 판매하고 있으며, 이를 어기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반면에, 한돈은 돼지 품종을 따지지 않는다. 요크셔건 버크셔건 랜드레이스건 두록이건 한국에서 키우고 도축만 하면 한돈이다. 국산 돼지나 돼지고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름만의 한돈은 엉뚱하게도 한우의 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축산인들은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한우가 토종 소이니 한돈을 토종 돼지에다 붙이면 되지 않을까? 토종 돼지라 하면 한국인 대부분은 흑돼지를 떠올린다. 흰 돼지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온 품종이고, 흑돼지는 한반도에서 우리 조상이 오랫동안 키워왔던 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일부 맞기는 맞는다. 한반도의 토종 돼지는 흑돼지였다. 그러나 지금 흑돼지는 한반도 토종 흑돼지가 아니다.

"돼지는 대개 흑색으로 마른 것은 적으며 복부가 부풀어 늘어진 열등종인데 대개 사양되는 소와 마찬가지로 도처에 없는 곳이 없다. 그 수는 일본 이상이고, 매우 불결하다. 우리에서 사육되는 것이 보통인데 도로에 방양(放養)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또한 드물게는 귀를 새끼줄로 매어 말뚝이나 나무 막대기에 매달기도 한다. 잔반, 겨, 간장 찌꺼기, 술지게미, 두부 찌꺼기, 채소 부스러기 등을 주어 기른다."(1905년 '조선토지농산조사보고')

제국이 식민지 경영에서 처음 하는 일은 식민지 자원에 대한 조사이다.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서 무엇을 빼먹을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일제도 한반도의 자원에 대해 조사를 하였고, 그 기록이 '조선토지농산조사보고'에 남아 있다. 이 조사에서 그 당시 한반도의 토종 돼지는 흑색이며 복부가 부풀어 늘어진 열등종이라 하였다. 그다음으로 제국주의자가 하는 일은 우등한 자원은 확대 생산하게 하고 열등한 자원은 개량하는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의 가축 중에서 우등한 자원으로 꼽은 것은 딱 하나 소였다. 돼지는 개량 대상이었다.

"조선의 재래종 돼지를 사양하고 비육 시험을 실시한 바 마른 체구를 기름지게 살찌우는 특성이 모자라서 비육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는 도저히 육용 동물로서 경제상 가치가 없음이 증명되었다."(1907년 '권업모범장 보고')

일제는 한반도의 토종 돼지가 열등하여 경제적 가치가 없다고 보았다. 그 열등함을 1918~1919년 '권업모범장 보고'에 수치로 기록해 놓았는데, 2년을 키운 조선 돼지의 무게가 겨우 30~37.5㎏이다. 비교군인 만주 돼지에 비하면 4분의 1, 버크셔에 비해서는 6분의 1 크기이다. 이 정도이면 경제적 가치는 제로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토종을 말살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바르지 않다. 일제는 식민지 한반도의 농업 생산성 증대를 위해 노력하였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열등한 종자를 개량하였다고 해석하여야 한다. 물론 더 많은 것을 수탈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면, 옛날 시골집의 돼지우리에서 꿀꿀거리던 그 흑돼지의 정체는? 이 흑돼지는 다 크면 적어도 100㎏은 넘었다. 크기만으로도 한반도 토종이라 보기는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퍼진 버크셔와 버크셔 잡종, 만주 돼지, 버크셔·만주 잡종 등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이 흑돼지를 토종이라 여기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흑돼지에게 익숙해진 탓이다. 특히 1970년대 이후 크게 번진 요크셔가 외래종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면서 반사적으로 검기만 하면 토종이라는 관념이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록을 보면 일제가 한반도에 퍼뜨린 주요 돼지 품종은 버크셔이다. 물론 한국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개량한 버크셔일 것이다. 버크셔는 환경 적응 능력이 뛰어나고 고기가 맛있어 지구상에 널리 퍼져 있는 고품질 돼지이다. 버크셔의 특징은 몸통 털은 검으나 코와 네 발, 그리고 꼬리 끝에 하얀 털이 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키우는 흑돼지를 보면 대부분 이 흰 털이 사라졌다. 버크셔의 피를 가지고 있음에도 종자가 관리되지 않아 잡종이 된 것이다. 이런 버크셔 돼지를 '먹통'이라 한다. 맛도 버크셔 고유의 것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돼지 품종은 흰 돼지인 요크셔이다. 요크셔는 버크셔에 비해 그렇게 맛있는 돼지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사료 효율에서 요크셔만 한 돼지가 없다. 수입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실정을 생각하면 요크셔 나름의 미덕을 인정하여야 한다.

한국인은 국산 또는 토종이기만 하면 다들 맛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한반도 것이라 하여도 세계 여러 지역 것보다 열등할 수 있다. 한국 농수축산물을 수입 농수축산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놓은 '신토불이' 정신은 일부 긍정적 작용도 하였으나 과도한 민족주의를 부추겨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고 있음도 이제는 고백할 필요가 있다.

국산이면 한돈, 검기만 하면 토종, 이런 분류 방식으로는 소비자가 자기 입맛에 맞는 돼지고기를 선택할 수 없다. 돼지고기 맛을 결정하는 첫째 요소는 품종이다. 요크셔는 살이 연하여 두툼한 고기의 요리에 어울린다. 버크셔는 육질이 단단하고 기름에 수분이 적어 얇게 썰어 요리하는 것이 좋다. '먹통'은 버크셔와 비슷한 맛은 있으나 관리된 품종이 아니라 한결같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문화를 선진과 후진으로 나눈다면, 사물을 용도에 맞게 적절하게 분류하고 있는가를 그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현재 한국인의 돼지고기 분류가 선진적인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