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쟁이 불붙고 있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 발간을 둘러싼 설전(舌戰)이 날로 뜨겁다. 역사학계뿐 아니라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앞장서서 격돌하는 중이다. 언론과 시민사회에까지 퍼진 역사 담론 투쟁에서 품격 있는 상호 비판을 찾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차분한 토론 대신 적의(敵意)와 막말의 돌팔매질이 넘쳐난다.
역사 교과서 문제가 사회적 논쟁으로 번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진보 정권 10년간의 왜곡된 역사 교육을 고치겠다고 선언했다. 곧이어 보수 단체들이 금성출판사 역사 교과서를 '좌편향'이라며 공격해 4년이 넘는 법률적 다툼으로 이어졌다. 2011년에는 한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들어가 보수·진보 간 공방이 있었다. 진보 진영이 교학사 교과서의 '우편향'을 공격해 공수(攻守)가 바뀐 2013년의 파동은 역사 전쟁 제3라운드에 해당한다.
교과서는 응당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유독 역사 교과서가 잦은 논쟁에 휩싸이는 데는 두 가지 본질적 이유가 있다. 첫째, 여러 교과서 가운데 역사 교과서가 '국민 만들기'와 '국가 세우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의무교육제를 도입한 모든 국가에서 국어와 함께 국사가 핵심 과목인 것도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다. 학생들의 애국심과 시민 의식을 북돋아 국민적 정체성을 닦는 역사 교육이야말로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의 미래를 규정한다. 국사 교육이 정치 공동체의 존망을 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와 달리 역사 교과서가 첨예한 갈등의 대상이 되는 '역사적 이유'다.
둘째, 역사 교과서 논란은 역사적 지식의 근본 성격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과 직결된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사건들을 모아도 역사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무수히 많은 사실과 사건 모두를 기록하는 작업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산같이 쌓인 사료(史料)들을 찾아 정리하면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역사가에게 불가피한 이런 실천적 개입을 우리는 사관(史觀)이라 부른다. 객관성을 지향하면서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은 이런 역사관의 동아시아적 표현일 터이다.
비슷한 통찰을 담아 낸 것이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명제다. 파시즘에 대항했던 이탈리아 역사철학자 크로체(B Croce·1866~1952)의 주장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도 현재 상황과 관련해 재해석되며, 미래의 목적과 이어져 서술된다는 얘기다. 동학란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뀌고 5·18 광주사태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승격되듯 역사 서술은 사실(史實)과 사관(史觀)의 변증법적 종합이다.
영국 역사학자 카(E. H. Carr·1892~1982)도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자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 과정'이란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 통찰을 실행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대표작인 14권짜리 '소비에트 러시아사'에서 그가 정작 자신의 말을 실천했는지 의문일 정도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공자의 춘추필법조차도 중화주의로 왜곡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사관 없는 사실은 맹목(盲目)에 불과하며 사실 없는 사관은 독단일 뿐이지만 역사가가 맹목과 독단의 덫을 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누구도, 또 어떤 집단도 역사 서술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독점할 수 없는 철학적 이유다.
다시 강조컨대 역사 교과서가 논란을 부르는 두 가지 이유, 즉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이유가 엄존한다. 비록 한국 근·현대사 서술에서 소수(小數) 견해지만 검정 과정을 통과한 교과서를 매도하기보다 차분히 논의해야 하는 까닭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균형 잡힌 역사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른바 '우편향' 교과서와 '좌편향' 교과서 모두 사실과 역사관을 조화시켰다고 자부하는 상황에서 문제 해결은 쉽지 않다.
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역사 전쟁에서 우리는 협박을 멈추고 토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반도 남북의 '국가 세우기'와 '국민 만들기'로 각기 어떤 나라와 어떤 사람들이 생겨났는지 물어야 한다. 대한민국 교과서는 남과 북 어느 쪽의 역사가 민주국가와 자유 시민을 창조했는지 답해야 마땅하다. 결국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