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기체가 두꺼운 비구름을 뚫고 함부르크 공항에 내리려는 참이었다."
서늘한 독백으로 시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64)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이 최근 민음사에서 재출간됐다. 이 소설은 1989년 문학사상사에서 '상실의 시대'란 제목으로 출간돼 150만부 넘게 팔렸다. '노르웨이의 숲'의 표지는 이우환(77)의 '선으로부터'(1976). 푸르스름한 세로 선이 빽빽하게 들어찬 그림이다. 편집자 양은경 민음사 과장은 "동양화 느낌이면서도 유럽 감성이 느껴지는 표지를 고민했다. 북유럽의 침엽수림 같은 느낌이 제목 및 내용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미술 관련 서적이나 역사서 표지로 즐겨 쓰이던 명화(名畵)가 문학이나 인문 교양서 표지로 속속 들어오고 있다.
6월 말 출간된 황현산(68)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난다) 표지는 독일 화가 팀 아이텔(42)의 '무제(관찰자)'. 김민정 난다 편집인은 "그림의 무거움과 책의 중량감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택했다"고 했다.
2008년 출간돼 60만부 넘게 팔린 김혜남(54)의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갤리온) 표지는 살바도르 달리(19 04~1989)의 '창가의 소녀'(1925)다. 독자들로부터 "표지가 눈길을 끌어 책을 샀다" "책과 함께 좋은 그림 한 점을 갖게 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는 등 찬사를 받았지만 사실 편집 단계에서는 출판사 내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편집자 강수진 갤리온 대표는 "스페인 여행을 갔다가 이 그림을 처음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런데 직원들이 '우울하다' '펑퍼짐한 아줌마 같다'며 싫어했다"고 했다. 강 대표는 결국 그림 속 여성의 엉덩이를 띠지로 가리기로 합의하고 책을 출간했다. 독자 반응이 좋자 속편 '심리학이 서른 살에게 답하다'에도 명화를 썼다. 벨기에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향수'(1940)다.
200만부 팔린 신경숙(50)의 장편 '엄마를 부탁해'(창비) 표지 그림인 달리의 '새벽, 정오, 일몰, 그리고 황혼'(1979)은 신경숙 작가가 추천한 케이스다.
사망한 지 70년 미만의 작가 작품을 표지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료를 내야 한다. 저작권료는 발행부수에 따라 달라지는데, 한국미술저작권관리협회에 따르면 2501~5000부를 찍고, 표지를 컬러로 했을 때 37만4000원 정도다. 박신규 창비 문학출판 부장은 "'엄마를 부탁해'는 초판을 많이 찍었기 때문에 상당한 저작권료를 지불했다. 금액은 밝히기 힘들다"고 했다. '서른 살이…'는 저작권료로 60만원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명화 표지는 독자들에게 고급스러움과 신뢰감을 준다. '품격 있는 독자'가 되고픈 소비자들의 욕망을 건드리기 위해 출판사들이 명화의 아우라를 차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