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모르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시달리던 서기 13세기, 불심(佛心)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만들었던 엄청난 규모의 불경 목판입니다. 경판의 수가 무려 8만1258판, 모두 1496종 6570권의 불경을 망라한 이 대장경은 불경의 수와 정확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입니다. 그런데.
그 팔만대장경을 만든 곳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의외로 많은 분이 여기서 ‘해인사’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네, 경남 합천 해인사는 지금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곳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판각된 것은 아닙니다. 당시 고려의 내륙 지방은 몽고의 기마병이 휩쓸다시피 했었습니다.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다가 행여 갑작스런 몽고군의 침입을 받는다면, 그래서 애써 만든 대장경이 불타 버린다면 너무나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당초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부터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재조(再雕) 대장경’이란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그 전에 ‘초조(初雕) 대장경’이 존재했었기 때문입니다. 11세기 거란의 침입 때 똑같은 이유 때문에 국가적 사업으로 제작했던 대장경입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있던 이 대장경은 1232년(고종 19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만든 대장경이 바로 ‘재조 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입니다. 그런데 육지에서 대장경 제작을 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지금까지의 정설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라는 것이었습니다. 몽고 침략기의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에서 그런 작업을 했다는 설은 무척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근거는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 7년(1398년) 5월 10일의 기사입니다.
"임금이 용산강(龍山江)에 행차했다. 대장경 목판을 강화의 선원사로부터 운반했다."
용산강이란 마포와 노량진 일대의 한강을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길 때의 기록으로 생각됩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선원사에 대장경 제작을 맡은 대장도감(大藏都監)이 있었고여기서 대장경을 만든 뒤 보관했으며1398년에 여기서 용산강을 통해 서울로 가져왔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겼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습니다.
◇‘대장도감’ 어디에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어
그런데 이 설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선원사는 1245년(고종 32년)에 창건된 절입니다. 팔만대장경의 간행 기록인 간기(刊記)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대장경 판각은 1237년부터 1248년까지 12년 동안 이뤄집니다. 선원사가 생겨난 1245년은 이미 대장경 제작이 90% 이상 이뤄졌을 때입니다. 연대가 잘 맞지 않습니다.
또 하나, 선원사는 대장경을 보관하던 장소도 아니라는 겁니다. ‘고려사’ 고종 38년(1251년) 9월에 이런 기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왕이 성(城) 서문 밖에 있는 대장판당(大藏板堂)에 백관을 거느리고 가서 향을 올렸다. 현종 때의 대장경 판본이 임진년(1232년) 몽고병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왕과 군신이 다시 소원을 빌고 도감을 세워서 16년 걸려 완성했다.”
앞서 간행 기록으로 미뤄볼 때 이 ‘16년’이란 것은 대장경 제작의 준비기간까지 모두 포함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성 서문 밖 대장판당’이란 말을 유심히 봐야 합니다. 선원사가 있던 곳은 강화도 동쪽이지 서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대장경 제작을 모두 마치고 대장경을 보관한 곳은 선원사가 아니라 강화 옛 성(城) 서쪽에 있던 ‘대장판당’이란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선원사는 조선 태조 때 대장경을 옮길 때 배에 실어 한강으로 옮길 때 경유했던 곳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바로 이 ‘대장판당’이 대장경을 만든 장소일까요? 그렇다면 바로 그곳이 대장경 제작을 위해 설립된 기관인 ‘도감’, 즉 ‘대장도감’이 있던 곳일까요? 놀랍게도 ‘대장도감’이 과연 어디에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대장도감에는 분사(分司)가 있었습니다. ‘분사’란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고려시대 특유의 기관명이었습니다. 기본 관아에 속해 있으면서 일정한 인원이나 기능을 분리해 따로 둔 분관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분사 대장도감’ 또는 ‘분사도감’이란 이름의 관청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대장경을 판각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유명한 문집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서 확인됩니다. 이규보의 손자 이익배(李益培)가 쓴 발문(跋文)입니다. 발문이란 옛날 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말합니다. 여기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겁니다.
“이제 분사도감에서 대장경의 판각을 마치고 나서, 칙명을 받들어 이 문집을 판각하게 됐다.”
그러니까 ‘분사 대장도감’은 대장경을 제작하는 일을 맡았고, 이후 대장경 작업이 끝나자 기존 시설과 인력을 활용해 ‘동국이상국집’을 발간했다는 것이 됩니다.
또 한 가지 기록이 나옵니다. 고려 무신 정권의 실력자였으며, 최고의 권력을 지닌 집권자 최우의 생질이었던 정안(鄭晏·?~1251)에 대해섭니다. ‘고려사’ 정안열전의 내용을 보시죠.
“정안은 최우가 혼자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다른 사람의 재능을 시기하고 능멸하는 것을 보고 그 해를 멀리하고자 남해(南海)로 퇴거했다. 불교를 좋아해 명산(名山) 승찰(勝刹)을 편력했고, 사재를 희사해 구가와 약속하고 대장경의 반 정도를 간행했다.”
이 기록은 대장경 전체 분량의 절반이 ‘남해’로 퇴거한 정안에 의해 간행됐다는 내용입니다. 남해? 네, 지금의 경남 남해군입니다. 여기서 대장경이 만들어졌다면 ‘육지의 몽고군을 피해 섬인 남해에서 안전하게 작업을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의외로 많은 분이 “남해군이 무슨 섬이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남해대교로 육지와 연결되기 전에는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자, 이제 '분사 대장도감'에서 대장경을 만들었다는 기록, 남해에서 정안이 대장경의 '반 정도'를 간행했다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와 를 연결시켜 주는 자료가 발견됩니다. 바로 팔만대장경 중 '종경록(宗鏡錄)' 권27의 간행 기록입니다.
“정미세(丁未歲·1247년) 고려국 분사 남해 대장도감(分司南海大藏都監) 개판(開板).”
‘분사 대장도감’은 바로 남해에 있었고, 정안은 바로 이 남해의 ‘분사 대장도감’에서 대장경을 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팔만대장경 ‘남해 판각설’의 근거였습니다. 이 설을 주장해 온 학자 중의 한 명이 불교서지학 전문가인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이었습니다. 박 원장의 이 주장은 2011년 몇몇 언론에 소개됐지만, 남해 판각설이 이때 처음 나온 것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이 주장을 뒷받침해 줄 문헌 이외의 ‘물증’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대장경 473권의 목판에서 수정한 흔적 발견돼
그런데 지난달 27일, 박 원장은 남해에서 열린 ‘남해, 고려대장경 탄생의 비밀을 풀다’ 학술심포지엄에서 완전히 새로운 발표를 합니다. 저는 이 내용을 미리 입수해 8월 26일자 조선일보 A1면에 단독 보도했습니다.
대장경 목판 중 간행 기록을 실증적으로 전수 조사한 결과, ‘분사 대장도감’에서 간행됐다는 기록은 모두 500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 중 473권의 목판에서 ‘수정’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473권 모두 ‘분사 대장도감’이란 글자 부분이, 원래 글자를 팠던 부분을 모두 도려내고 새로 나무에 글자를 새겨 끼워넣었음이 밝혀졌던 것입니다. 고려청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감(象嵌) 기법이었습니다.
원래 새겨져 있던 글자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계묘년(1243년)의 간행 기록 2가지를 비교한 결과, 빽빽하게 ‘분사대장도감’이란 여섯 글자로 갈아끼운 곳에는 정상적인 글자 크기로 이런 네 글자가 새겨졌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대장도감(大藏都監).’
결국 대장경의 ‘분사 대장도감 판(版)’은 ‘대장도감 판(版)’과 같은 것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간행 기록에 ‘대장도감’이라고 된 목판은 사실 ‘분사 대장도감’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①‘대장도감’과 ‘분사 대장도감’이 같은 곳에 있든지 ②‘대장도감’이 다른 장소에 있었더라도 목판을 제작하는 실무는 모두 ‘분사 대장도감’에서 맡았다는 것이 됩니다.
①과 ② 중에서 어느 것이 맞더라도 팔만대장경은 분사 대장도감이 있던 ‘남해’에서 만들어졌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박상국 원장은 좀더 방증을 제시합니다. 대장경에는 목판을 만든 최동(崔東)이란 장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최동은 갑진년(1244년) 한 해에 ‘마하승기율’ ‘십송율’ ‘사분율’ ‘선견율비파사서품’ 등 10여 개의 ‘대장도감판’ 경전을 판각했고, 같은 해에 ‘살파다비니비파사’ ‘아비담비파사론’ ‘법원주림’ 같은 ‘분사 대장도감판’도 새겼습니다. 동일한 장소에 있으면서 ‘대장도감판’과 ‘분사 대장도감판’을 새겼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증거들을 근거로 박 원장은 “팔만대장경은 100% 남해에서 만들어진 것이 맞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100% 남해’란 설에는 의문이 남습니다. ‘대장도감’과 ‘분사 대장도감’이 같은 곳이었다면 왜 굳이 ‘분사’라는 말을 붙였을까요? 박 원장은 “1243년 이후 제작에 참여한 정안의 공로를 강조하기 위해서 따로 ‘분사’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반론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요. ①남해의 ‘분사 대장도감’에서 제작됐지만 ‘대장도감’이라고 기록된 목판 ②이것을 다시 파내고 ‘분사 대장도감’으로 고친 목판 ③처음부터 다른 장소에 있었던 ‘대장도감’에서 만들어진 목판. 박 원장은 ①과 ②의 존재만 인정할 뿐 ③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③의 존재 여부를 실증적으로 가리는 것이 앞으로 학계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의문입니다. 대장경이 남해에서 제작됐다면, 왜 굳이 강화도로 옮긴 뒤에 다시 해인사로 옮기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요? 남해에서 대장경 제작을 끝낸 뒤, 대장경을 당시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로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 말부터 왜구의 강화도 침략이 극심해지자 ‘서문 밖 판당’에 있던 대장경이 위태로워졌고, 깊은 산 속에 안전하게 보관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곳이 바로 해인사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