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혁명은 종종 ‘정의’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혁명의 목적은 부조리를 타파하고 부패를 척결하며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을 ‘의거(義擧)’라고도 한다.

대체로 혁명에의 의지는 불평등을 목격한 후 분노로 촉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한민국의 6,7,80년대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한 젊은 대학생들의 투쟁이 그랬고 여행 중 라틴 아메리카 서민층의 고단한 삶을 목격한 체 게바라가 그랬다. 누구나 행복한 인간의 삶, 평등한 인류를 꿈 꾸며 혁명은 일어난다.

영화 '설국열차', '커티스' 역의 크리스 에반스

영화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과 이들의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는 기차 앞칸의 상류층에 비해 피폐한 꼬리칸 사회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혁명을 도모한다. 커티스와 그의 일당이 꿈꾸는 것은 기차 안 사람들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한 것.

그런데 누구나 평등한 사회, 과연 가능한 것일까.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기준이 신분제도의 유무라고 한다면 신분제도가 사라진 근대는 평등한가? 물론 그렇지 않다는 걸 누구나 다 안다. “Occupy Wall Street(월 가를 점령하라)” 구호가 울려 퍼진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았고, 사람들로 꽉 찬 월 스트리트 전경을 관광 삼아 샴페인을 마시며 웃는 사람들의 잔상이 아직 생생하지 않은가. 자본의 유무로 신분제도를 대신하고 있는 현대에도 불평등에의 분노는 여전하다.

그래서 기차의 절대자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는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를 위해 평등이 아닌 ‘균형’을 모토로 삼는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숫자가 적당히 유지되면서 완벽한 생태계를 이루는 수족관처럼, 스테이크를 먹는 상류층과 프로틴 블록(Protein Block)을 먹는 하류층이 자신에게 허용된 그만큼의 행복을 누리며 제 자리를 지키는 것을 윌포드는 ‘균형’이라고 말한다. 그는 균형이 유지되는 삶에 안정이 있다고 믿었다.

영화 '설국열차', '윌포드' 역의 애드 해리스

정의라 여겼던 터질듯한 혁명의 기운을 기차 맨 앞 칸, 엔진이 있는 그곳까지 끌고 온 커티스. 수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뒤로 하고 기어이 윌포드를 찾아간 지친 커티스에게 윌포드는 ‘균형’의 개념을 달콤하게 속삭인다.

‘평등’과 ‘균형’은 언뜻 비슷한 의미로 들리지만 영화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두 개념이 충돌한다. 폭주기관차처럼 선로에서 이탈할 듯 전진, 또 전진하던 영화의 속도는 끝 부분 커티스와 윌포드로 대변되는 ‘평등’과 ‘균형’, 이 둘이 충돌하면서 주춤한다. 주춤하는 이유는 정의라 여겼던 커티스의 ‘평등’을 향한 염원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아졌다는 데 있다. 자신도 모르게 윌포드의 ‘균형’ 이론에 마음이 기우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하긴 커티스와 함께 했던 동료들이 죽었고 혁명에 의해 질서는 파괴되었으며 기차가 멈출 위기에 맞닥뜨린 지금 ‘평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윌포드의 ‘균형’은 정의롭진 않을지언정 합리적이긴 하다. 엔진칸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커티스의 갈등은 그래서 이해가 된다. 영화는 다행히 ‘평등’과 ‘균형’의 개념을 넘어서는 ‘희망’을 암시하고 막을 내렸지만 현실에서도 희망을 바랄 수 있을까.

‘체 게바라’의 초상화는 혁명의 상징으로 성역이 되어 후세에 남겨졌지만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을 꿈꿨던 동료 피델 카스트로는 47년간 쿠바를 집권한 독재자로 남았다. 리비아의 혁명을 꿈꿨던 27살의 젊은 카다피는 42년간 독재자로 집권하였고 또다른 혁명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역사 속에서 돌고 도는 혁명 또 혁명. 영화 속 기차는 멈췄지만 반복되는 역사는 멈출 줄을 모른다.

영화 '설국열차' 파이널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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