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서울 서초동 법원 청사 417호 형사대법정.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계속된 SK 최태원(53) 회장과 동생 최재원(50) 부회장에 대한 공판에서 스피커를 통해 녹음 파일이 공개됐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SK 계열사들이 베넥스인베스트먼트에 출자한 펀드 자금 460여억원을 최 회장이 개인 선물 투자에 쓰기 위해 김원홍(52) 전 SK해운 고문에게 송금(횡령)한 사실이 있는지 여부다. 최 회장은 이 횡령 혐의가 인정돼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김원홍 녹취록 공방
"누가 봐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잖아. 니는 진짜 아무 죄 없고, 최 회장은 정말 더 죄가 없고, 어떻게 보면 준홍이하고 내가 너희 형제를 속인 거잖아." 김원홍 전 고문이 2011년 12월 검찰의 재소환을 앞둔 최재원 부회장과 통화한 내용이었다. "내가 나중에 누명 벗겨줄게. 알았지?"라는 김 전 고문의 말에 최 부회장의 "네"라는 대답이 법정에 울렸다.
서울고법 형사4부 문용선 재판장은 "재계 3위 대기업 회장과 부회장이 김원홍한테 홀린 것 같다. 수천억원을 홀딱 빼앗겼다"면서 "김원홍이 나쁘면 나쁠수록 최 회장은 그만큼 덜 나쁜 사람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변호인석을 향해 "이게 독(毒)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을까요? 과연 이것이 (최 회장은 죄가 없다는) 탄핵 증거로 될까요?"라고 반문했다. 변호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날 재판장과 검찰, 변호인 측은 '김원홍 녹음 파일'을 놓고 뜨거운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관심을 모았던 김 전 고문과 최 회장의 통화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고, 김 전 고문과 최 부회장 간의 통화 등 3건만 공개됐다.
녹음 파일은 2011년 12월 무렵 검찰이 수사에 나선 이후 사건 당사자들이 통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날로 14차 공판을 치른 이 사건은 사실 관계를 다투는 항소심 재판 막바지에 이르렀다.
녹음 파일을 풀어놓은 녹취록은 12차 공판에서 법정에 제출됐고, 재판부는 녹취록이 실제 음성 파일과 일치하게 사실대로 기록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음성 파일을 틀어 직접 들어볼지를 놓고도 고심을 거듭했다.
◇변화무쌍한 수사와 재판
이번 사건은 검찰 수사 때부터 곡절이 많았다. 2011년 12월 검찰에 처음 소환된 최재원 부회장은 "펀드 횡령과 무관하다"고 진술했으나 6일 만에 다시 나와 '자수서'를 냈다. 펀드 횡령은 본인이 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검찰은 최 부회장을 구속했고 최 회장을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최 회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한 반면 구속 기소된 동생 최 부회장에겐 오히려 무죄를 선고했다.
SK 측은 항소심에서 '전략'을 바꿨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김 전 고문의 역할을 부각했다. 그는 460억원 펀드 운용을 주도했지만 사건이 불거지기 직전 중국으로 떠났다. SK 관계자는 "김씨와의 관계가 알려지면 최 회장 이미지가 나빠질까봐 우려했지만 사실 관계를 바로잡는 차원에서 녹취록을 공개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 회장 형제는 김 전 고문과 베넥스인베스트먼트 김준홍(47) 전 대표의 역할을 강조했다. 하지만 김준홍 전 대표가 법정에서 여러 차례 진술을 바꾸면서 재판부가 불신하는 모습을 보이자 SK 측에서 마지막으로 카드로 '김원홍 녹취록'을 꺼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