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간 국회에서 민주통합당을 취재하다 지금은 디지털뉴스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국희 기자입니다.
국회는 ‘말(言)’이 많은 동네입니다.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고 하는 ‘일당백’ 300명의 국회의원들이 있고, 이들이 각자 거느리고 있는 보좌진(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2명, 6·7·9급 비서 1명, 인턴 2명)도 의원 한명당 9명씩 있습니다. ‘정치 9단’을 자처하는 이들만 3000명인 셈입니다.
여기에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공식 출입기자들만 각각 900명(지난해 기준)이 넘습니다. 각종 정부 기관과 대기업에서 국회에 파견한 ‘연락관’들을 비롯해 ‘찌라시’를 제작·공급하는 여의도 증권가의 ‘소식통’들도 넘쳐납니다. 줄잡아 5000여명의 정치 관련 인사들이 하루에 한마디씩 쏟아내는 통에 국회는 ‘발 없는 말이 만리(萬里)는 간다’는 말이 정말 딱 들어맞는 곳입니다.
‘발 없는 말이 만리 가는 국회’,
여성의원의 스타킹 심부름 당한 男보좌관 ‘여비 통신’에 ‘SOS’!
그 중에서도 국회 사람들, 특히 국회의원들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는 ‘빠꼼 소식통’이 있는데, 바로 ‘여비(女秘) 통신’ 혹은 ‘행비(行秘)통신’으로 불리는 국회의원 여비서 네트워크입니다. 여비서들은 보통 인턴이나 9급 말단 직원인 경우가 많은데, 의원실 내 각종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고 해서 행정 비서라고도 합니다.
여비서들은 의원실 출입구쪽 책상에 앉아 의원들의 사적(私的)인 업무부터 각종 잔심부름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의원들을 책임지지요. 의원회관 건물의 같은 층에 있다는 이유로, 옆방 혹은 앞방이라는 이유로, 같은 상임위 소속이라는 이유로, 그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데는 여야(與野)의 경계선이 무의미합니다. ‘여비 통신’은 주로 인터넷 메신저나 카카오톡을 통해 그날의 ‘핫이슈’를 삽시간에 퍼트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여비 통신의 특성상 주로 국회의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은밀한 얘기들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어느 의원이 또 짜증을 부렸다더라” “어느 방에서 의원이 말도 안되는 지시를 내렸다더라” 같은 것들이 주요 레퍼토리로 이런 얘기가 쌓이면 해당 의원의 평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8대 국회 때입니다. ‘한 미모’로 유명했던 여성의원 A가 역시 뛰어난 미모의 여성의원 B의 사진이 패션잡지나 언론 지면에 실리는 날이면 똑같은 스케줄을 잡아오라고 보좌진들을 다그쳤다는 사실은 ‘여비 통신’의 독점 보도였죠.
혼자 살던 여성의원 C가 자신의 집으로 남자 보좌관을 불러 못을 박아달라고 했다는 얘기나, 그가 휴일에 그 보좌관 집 앞으로 와인을 사들고 찾아갔다는 사실들이 알려지면서 해당 의원이 호사가(好事家)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습니다. 이 여성의원에게 스타킹 심부름 등을 당한 남자 보좌관이 여비서들에게 사정을 하소연하면서 비밀이 새 나왔답니다.
17대 국회 때는 마포대교를 달리고 있던 D의원의 운전 기사가 자신을 호되게 질책하던 의원이 “너 내려”라고 하자 정말 한강다리 한 가운데서 차를 내버려두고 가버렸다는 일화는 ‘여비 통신’의 전설로 내려옵니다. D의원의 평판도 당연히 큰 금이 났지요. 최근 이 이야기는 운전 기사가 차 열쇠를 뽑아 한강으로 던져버렸다는 내용으로까지 업데이트됐습니다.
물론 여비서들의 추측에 근거한 사실들이 잘못 전파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올초에는 각각 기혼인 19대 초선 여성의원 E와 동갑내기 F보좌관이 부적절한 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일부 언론에 기사화되기까지 했지만 당사자들은 관련 사실을 일체 부인했습니다.
‘여비 통신’의 파워는 점점 막강해지고 있습니다. 9급 말단으로 들어와 의원과 동고동락했던 여비서가 자신이 모시던 의원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덩달아 직급도 올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의장실이나 부의장실의 경우 4급까지 올라간 여비서들을 볼 수 있고, 일반 의원실에서도 의원의 신뢰를 받으며 정책 분야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힌 5·6급 여비서들이 심심찮게 있습니다.
의원 정치 생명 좌우하는 수행 비서들..
‘낮(午)말은 여비서가, 밤(野)말은 수행 비서가 듣는’ 여의도 新정보 유통 구조
‘여비 통신’에 버금가는 또다른 정통 소식통은 ‘수행 비서(운전 기사) 네트워크’ 입니다. 새벽부터 심야까지 국회의원들의 모든 동선(動線)에 동행하며 업무 특성상 의원이 언제 누구를 만나러 이동하는지, 차 안에서 휴대전화로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가장 확실하게 아는 그들이기에 정보의 신뢰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주로 수행 비서들은 중장년층 남성이 많은 관계로 ‘여비 통신’처럼 온라인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 국회 본회의나 상임위가 열리는 날 주차된 차 앞에서 의원들을 기다리며 서로 담배를 피우다, 아니면 의원회관 지하의 수행 비서 전용 대기실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거나 낮잠을 자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위력은 익히 유명해 ‘수행 비서들에게 찍히면 죽는다’는 말이 국회에서 지금도 불문율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特權)’을 십이분 활용하는 수행 비서들이 빈번했던 탓이죠.
지난해 총선에서 새누리당 현기환 의원에게 공천 헌금 3억원을 전달했다는 의혹으로 재판 중인 새누리당 현영희 의원 사건의 제보자는 돈 심부름을 맡은 현 의원의 수행 비서였고, 국회는 아니지만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구속으로 이어진 파이시티 로비 의혹 사건 역시 제보자는 돈 심부름을 했던 최 전 위원장의 수행 비서였습니다.
17대 국회 당시 ‘486 의원 G는 룸살롱 단골 손님이라더라’는 말이 퍼져 해당 의원이 품위에 큰 손상을 입었는데, 이는 룸살롱까지 차량을 운전했던 수행 비서가 아니면 알기 힘든 사실들이었습니다.
지난해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전 수행 비서가 강남의 한 빌딩주를 협박해 1억원을 빼앗은 혐의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대선을 앞두고는 부산저축은행 로비스트 박태규씨의 운전 기사가 박씨와 박근혜 대통령이 만난 적이 있다는 허위 사실을 '나는꼼수다'에서 폭로해 구속됐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올들어 19대 국회에는 ‘수행 비서 경계령’이 내려졌습니다.
의원들도 최근에는 수행 비서를 조심하고, 수행 비서 역시 잘못된 소문이 퍼질 경우 주위로부터 1순위로 의심받는 강도가 훨씬 높아져 어느 때보다 입조심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친인척 중에서 수행 비서를 고용하는 의원들이 최근 늘어나는 것은 치부(恥部)를 덮고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인 셈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낮(午)말은 ‘여비서’가 듣고 밤(夜)말은 ‘수행 비서’가 듣는다”는 여의도 정가의 비공식 정보 유통구조는 앞으로 점점 더 공고해질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