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창간 첫해인 1920년 6월 16일자 2면에 실린 한 광고는 독특한 삽화부터 눈에 띈다. 한복 차림의 여성이 의자에 앉아 입을 벌리고 있고, 마주 앉은 남자가 여성의 입 안으로 기구를 넣어 무언가 시술을 하고 있다. 치과 광고다. 그런데 하단을 보면 시설 명칭이 '치과의원'이 아니다. 경성 관철동에 개업했다는 이곳 이름은 '동양 치술원(齒術院)'이다.
1920년엔 이미 경성에 치과 의원이 개업 중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894년 남대문에 일본인이 일찌감치 치과의원을 첫선 보였고, 1914년엔 한국인도 치과의원을 개업했다. 하지만 90년 전 치아를 고치는 곳은 치과의원만이 아니었다. 치의학을 이수한 치과의사와 별도로, 인공 치아 심어주는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치아 진료소 문을 연 것이다. 이름도 다양해 '치술원'뿐 아니라 '잇방' '치방'도 있었다. '이 해 박는 집'이라는, 소박하고 직설적인 간판도 경성에 내걸렸다.
1920년의 치술원 광고는 '제반 설비를 무루(無漏·빈틈 없이) 완비'했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그림 속 의사는 조명등도 없이 보통 의자에 환자를 앉히고 진료하고 있다. 그래도 의료 시설 광고로는 이례적으로 진료 장면 삽화까지 넣은 것은 90년 전 치술원이 마케팅에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21년 조선일보 광고로 개업을 알린 서대문의 '반도 치과의원'은 '친절한 진료', '견고하고 아름다운 치아 가공' '요금은 바르게' 등 캐치프레이즈까지 내세웠다(조선일보 1921년 3월 17일자). 이 치과의원은 4월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광고를 만들었다. 눈길을 끌어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1921년 4월 18일자). 1920년대 치과 진료소들의 적극적 광고는 당시 구강 위생에 관한 대중 의식 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신문 기사에서도 이가 갑자기 아프면 '이쑤시개 같은 것으로 치아 속 찌꺼기를 파내고 그곳에 상처 치료제인 요오드팅크를 발라라'는, 다소 황당한 조언을 소개할 정도였다(1927년 3월 17일자). 1930년대 들어 치과의사회는 매년 6월 4일을 충치예방일로 정하고 무료 진료를 하며 계몽 활동을 펼쳤다(1936년 6월 3일자). 초창기 치과의 모습은 오늘의 치과 의사들에게 소중한 역사로 추억된다. 국회의원을 지낸 한 치과의사는 2009년 경기도 안산에 진료비 거품을 없애겠다는 치과를 열면서 '이 해 박는 집'이란 간판을 걸었다(2009년 6월 23일자).
입력 2013.04.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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