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제주 4·3 사건을 재현한다는 목적보다 당시 이름 없이 사라진 원혼들에게는 위로를, 아직까지 가슴에 상처가 남아있는 자들에게는 치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됐다."

오멸(43) 감독은 7일 서울 왕십리CGV에서 영화 '지슬'을 연출하면서 "잔인함을 들추기보다는 그때 고통을 겪은 분들을 치유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역사성이 있는 4·3사건이 영화화 됐을 때 관객들이 그 시절의 모습을 생생히 그리길 바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교육을 하는 건 내 몫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분들 중에는 제주도에서 총격으로 부상을 당한 분들도 있을 거다. 그 통증을 다시 꺼내서 얘기하면 분노밖에 남는 게 없다. 교육은 교육기관이 하고 나는 치유를 해주고 싶다. 무언가를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는 설명이다.

'지슬'은 1948년 겨울 '해안선 5㎞ 밖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한다'는 미군정 소개령을 시작으로 3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사라진 제주 4·3사건을 영화화했다. 제주 섬사람들이 왜 빨갱이로 내몰렸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는 알리지 않는다. 죽음에 노출됐지만 동굴에 옹기종기 모여 소소한 농담과 함께 따뜻한 감자를 나눠먹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오 감독은 "시작부터 개봉하기까지가 굉장히 힘이 들었다. 예산이 많지 않아 우리도 피난하는 사람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한 끼를 먹는 것도 돼지죽 같은 정체가 모호한 덮밥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살아있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또 누구 한 명 힘들다고 현장에서 티를 내지 않았다"며 고마워했다.

오 감독은 돌아가신 분들의 제사를 지낸다는 마음으로 '지슬'을 만들었다. 제의적 형식으로 '신위'(영혼을 모셔 앉히다), '신묘'(영혼이 머무는 곳), '음복'(영혼), '소지'(신위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 등 4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됐다.

"요즘, 제사 때 울지 않는다. 친척들도 만나고 웃기도 하는 또 다른 축제가 됐다. 우리 영화도 중간중간 웃으면서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제사 자체가 슬픈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 "첫날 연출부에게 프롤로그에 쓸 소품으로 그릇들을 구해오라고 했는데 그들이 빌려온 게 우연히 모두 제기였다. 그리고 지방을 써서 문에 붙여 촬영감독과 간소하게 제를 지내고 음복한 후에 촬영에 들어갔다. 촬영장에서 항상 막걸리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도, 누군가 죽는 장면을 촬영할 때 언제나 지방지를 준비하게 된 것도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의 제사였는데 영화의 시작과 끝이 됐다"고 전했다.

'지슬'은 개봉에 앞서 1월26일 독립영화계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심사위원 대상을 따냈다. 또 19회 브졸 국제아시아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수레바퀴상을 수상했다. 2012 올해의 독립영화상, 2012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 시민평론가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무비꼴라쥬상까지 거머쥐며 국내외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오 감독은 "제주 사람들은 제주 4·3사건을 세계화하고 싶어 한다. 군인은 군인대로, 피해자는 피해자들대로 슬픔을 가지고 있는 거다. 우리의 이야기를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너희도 슬프고 우리도 슬프다'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관객들이 제주도 사건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팠던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상영에서도 자기네 나라는 스스로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거기 있는 분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팠다'를 느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도 많은 분들이 함께 웃고 우는 모습을 보면서 놀랍기도 했지만 따뜻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슬픔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밝게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가. 어느 하나의 감정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웃음과 울음 사이를 오간다. 하나의 정서를 강요하는 것에는 불편함을 느꼈다."

'지슬'은 1일 제주에서 개봉한 데 이어 21일 전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