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하드 : 굿 데이 투 다이'에서 적의 심장부를 찾아가 무장한 채 엘리베이터를 탄 존 매클레인(브루스 윌리스)과 그의 아들 잭(제이 코트니).

많은 국내 영화팬들은 잘 모르는 듯하지만, 할리우드 스타 브루스 윌리스는 사실 가수이기도 합니다. 그냥 노래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 'Respect Yourself'라는 음반도 냈고 공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쯤인가 조용히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브루스 윌리스는 용산의 미8군 사령부에서 장병을 위문했습니다( 당시 영화 담당 기자로서, 저는 부대 영내로 찾아가 브루스 윌리스에게 저돌적으로 다가갔고, 그를 인터뷰하는 특종을 올렸습니다). 그때 브루스 윌리스는 오랜 시간 무대에서 노래 공연을 하며 가수 실력을 톡톡히 보여줬습니다.

'다이 하드'시리즈 5편에 해당하는 존 무어 감독 '다이하드 : 굿 데이 투 다이 (A Good Day to Die Hard)'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브루스 윌리스의 가수 이력을 늘어놓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다이 하드'가 성공한 이유 중엔 감정을 꼭대기까지 뿜어내 본 가수가 아니면 잘 표출하지 못하는 '매력있는 광기(狂氣)'의 분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람보'에서부터 '007'까지 여러 액션 시리즈의 맛을 다 본 전 세계 관객들에게 1988년 등장한 '다이 하드'가 안긴 재미는 액션의 스케일이 아니라 존 매클레인이라는 주인공의 매력에 있었습니다. 우람한 근육을 과시하는 차가운 액션 영웅이 아닙니다. 미국식 유머도 씹어뱉으면서, 아내와 가족을 챙기는 인간적 온기(溫氣)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쳇말로 한번 '꼭지가 돌면' 물불 안 가리고 무차별 응징에 나서 더러운 무리를 '짓이겨' 놓았습니다.

'다이하드 : 굿 데이 투 다이'에서 아들 잭(제이 코트니)과 함께 적을 향해 자동소총을 난사하는 존 매클레인(브루스 윌리스).

한 줌의 황금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인질로 잡는 악당들을 향해 얼굴을 약간 틀고 눈도 조금 풀린 듯 찡그린 표정으로 MP5 기관단총을 반(半)미치광이처럼 난사하는 존 매클레인이 안긴 카타르시스의 짜릿함이란 대단했죠. ‘파워풀하게 날뛰는 매클레인’의 모습은 적을 향해 미친 듯 주먹을 날리면서 ‘아비요~’ 소리를 내던 이소룡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런데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맥이 빠집니다. '다이 하드' 특유의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일모레가 환갑인 브루스 윌리스가 더 이상 미치광이처럼 펄펄 뛰며 악당을 쳐부수는 통쾌함을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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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번 '…굿 데이 투 다이'의 제작진은 '노쇠한 브루스 윌리스'의 약점을 나름대로 감싸 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우선 러시아로 무대를 옮겨 스케일을 국제적으로 키우려 했습니다. 존 매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은 하나뿐인 아들 잭(제이 코트니)이 러시아에서 사건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듣고 난생처음 해외로 날아가서는 러시아의 국제 테러단과 정면으로 맞붙습니다.

'다이하드 : 굿 데이 투 다이'의 한 장면.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존 매클레인(브루스 윌리스)와 아들 잭(제이 코트니)이 서 있다. 이 시리즈의 과거 어느 편보다도 많이 부수고 많이 불태우는데, 액션의 폭발력과 긴장감이 그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영화엔 전쟁 영화처럼 많은 총성과 폭음이 난무하고 자동차 추격 신이 길거리를 뒤집어 놓습니다. 존 매클레인은 미니미 M249 기관총을 손으로 들고 ‘서서쏴’ 자세로 난사합니다. 브루스 윌리스는 뛰고 구르는 모습은 별로 보여주지 않는 대신 까마득한 고공에서 뛰어내리거나 자동차를 위험천만하게 모는 추격 장면을 많이 연기합니다. 스턴트맨의 도움을 받기 쉬운 장면들을 늘린 것이죠. 아들을 등장시켜 부자가 함께 액션을 연기하게 한 것에도 나이 든 부르스 윌리스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역대 어느 ‘다이 하드’시리즈보다도 많이 부수고 많이 불태우는데도 이번엔 관객의 심장 박동수가 별로 오르지 않습니다. 시리즈 특유의 긴장감과 매클레인의 매력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지랖 넓게 남의 나라까지 건너가 국제 테러단을 응징하는 스토리로 만들다 보니,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발생한 비상 상황 속에서 매클레인이 특유의 기지와 능력과 배짱으로 정면 돌파하며 악을 응징한다는 ‘다이 하드’만의 매력이 반감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러시아 배경의 007 영화처럼 되어버린 감이 있습니다. 브루스 윌리스의 힘 빠진 모습을 보는 건 안타깝습니다. 수십 년 만에 TV에 등장해 자신의 히트곡을 전성기보다 힘없는 목소리로 불러대는 흘러간 가수 같습니다.

'다이하드 : 굿 데이 투 다이'에서 미니미 기관총을 손으로 들고 난사하는 존 매클레인(브루스 윌리스). 그는 좀더 노쇠해졌지만 손에 든 무기들은 좀더 커지고 다양해졌다.

그러고 보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계속 액션을 고집하는 스타들이 브루스 윌리스 만은 아니군요. ‘차이니스 조디악’으로 돌아온 성룡은 17년 전 ‘폴리스 스토리4’에 출연할 때 여러 기자 앞에서 했던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엎고 계속 액션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1996년 1월 21일자 조선일보에 보도한 성룡 인터뷰에서 당시 42세의 성룡은 “앞으로 3∼5년 정도 활동한 뒤 배우 생활을 그만두고 감독으로 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성룡은 당시 이런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만일 제가 허리가 굽고 어기적거릴 수밖에 없도록 늙어 팬들이 ‘성룡이 왜 저래?’라는 실망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소룡이나 제임스 딘은 그 생애의 절정기에 죽음으로써 영원히 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죠. 이런 말 해서 안됐지만, 그들의 요절은 참 잘된 거죠.” 그랬던 성룡의 생각이 왜 바뀐 것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브루스 윌리스든 성룡이든 노년에도 연기를 계속하는 것이야 자유겠지만, 젊은 날의 패턴과 똑같은 액션 연기를 훨씬 떨어진 완성도로 해내며 팬들을 실망시키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시절엔 화면에서 액션을 폭발시켰으나 나이 들어서는 노년의 지혜와 깨달음을 젊은 세대에게 이야기하고 때론 그들을 꾸짖는 캐릭터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케이스가 괜찮은 사례라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