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파리 특파원

디암스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서른두 살의 프랑스 유명 여성 래퍼가 얼마 전 TV에 출연했다. 약물중독에 시달리던 그는 3년 전 돌연 활동을 중단했다. 이날 그는 잿빛 히잡(머리를 가리는 이슬람 전통 의상)을 쓰고 나타났다. 강렬한 랩 대신 조근조근한 말투로 "이슬람이 내 마음을 치유했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선 공개된 장소에서 히잡 착용을 법으로 금지한다. 그런데도 굳이 히잡을 쓰고 나온 이유를 묻자 그는 "프랑스는 톨레랑스(관용) 사회"라며 "사람들의 비판이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2004년 히잡 착용을 금지하면서 '종교적 위화감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같은 이유로 국민의 절대다수가 가톨릭을 믿지만 공립 초·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눈에 띄는 십자가 액세서리를 착용하지 못하게 한다. 가톨릭과 다른 종교들의 공존을 위한 '종교적 톨레랑스'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얼핏 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프랑스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세속주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은 종교에서 정치와 일상생활을 분리할 수 없다. 원천적으로 '종교적 톨레랑스'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이처럼 톨레랑스는 가끔 톨레랑스를 거부하는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관용과 타협을 강요하는 모순에 빠진다. 이를 '톨레랑스 패러독스'라고 한다.

최근엔 프랑스 사회의 또 다른 역설적 태도를 볼 수 있다. 파리 근교에는 생드니처럼 북아프리카 출신의 이슬람교도가 집단 거주하는 교외 지역이 있다. 이런 곳은 도시 기반 시설이 부족하고 범죄율·실업률은 높다. 최근 이슬람 국가인 카타르의 자본이 5000만유로(약 700억원)를 투자해 이 지역을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자 "프랑스가 이슬람에 지배당할 수 있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정작 프랑스는 이런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투자에 매우 인색하다. 우범 지역으로 지정해 경찰력만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과격 이슬람주의자의 테러 공포는 오히려 높아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랑스가 그동안 추진해온 다문화주의 정책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문화주의는 이민자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프랑스 문화와 공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이상과 달리 현실에선 오히려 갈등만 증폭시킨다는 시각이 있다. 최근 우파는 다문화주의를 포기하고 프랑스의 가치를 적극 주입해 이민자를 프랑스화(化)하자는 동화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프랑스의 고민은 이민자 문제를 '만인(萬人)은 평등하다'는 인본주의적 관점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시혜적 태도만으로는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는 호황과 불황이 반복하는 사이클이 있다. 하지만 이민자 같은 인구 문제는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좀처럼 흐름이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어렵고 훨씬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이민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외국인 고용 허가제, 결혼 이민 제도 등을 원점에 놓고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민자 문제는 여전히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