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김에리의 ‘영화를 논하다’
영화 ‘건축학 개론’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1990년대 전반기 대학을 다닌, 40대로 접어든, 신세대 혹은 X세대라 불리던 이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서로를 다시 엮고 재회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386세대를 위시로 한 ‘80년대 복고풍’이라는 말 대신 ‘추억의 90년대’가 통용될 만한 시기가, 이들이 청춘을 곱씹을 중년이 됐음을 알리는 타이머의 작동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다.
‘첫사랑’이라는 누구나 한번쯤 가슴에 품었지만 이뤄지지 않아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을 감성을 정곡으로 찌르고 들어가 세대를 초월한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 첫번째 성공요소다. 영화를 울면서 봤다거나, 내내 울면서 보는 중년여성을 목격했다거나 하는 관람기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남녀 주인공을 비롯,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생생이 살아있어 이들을 자꾸 보고 싶게 만드는 것도 반복 관람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막연히 이상화된 첫사랑의 여인이 아니라 딱 그 또래 여대생이 쓸만한 어투를 툭툭 내뱉는 서연(수지), 어리숙한 범생이 스타일의 공대생 승민(이제훈), ‘서태지와 아이들’이 유행하던 시기의 재수생 날나리 패션과 헤어스타일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납뜩이(조정석), 그 시기 강의실에 딱 있음직한 강 교수(김의성)까지 누구 하나 부족해 거슬리는 인물이 없다. 압구정동 오렌지족으로 대변되던 강남 부촌 출신 대학생 재욱(유연석)을 등장시켜 당시 강남·북으로 나눠 차별되던 계급의식까지 건드리며 공감대를 극대화했다. 현재와 과거 회상장면의 반복되는 교차가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연대 공대 90학번 이용주 감독이 무려 10년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 다듬고 다듬은 대본은 나무랄 데 없는 상황과 대사들을 만들어냈다. 대부분 고교졸업 후에나 이성교제를 시작해 연애에 서툴 수밖에 없고, 성적 순결에 대한 절대적 가치관이 아직 지배하고 있던 시대, 80년대 팝송의 우위를 뒤엎은 국내 가요의 전성기를 알리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CD 등등.
삐삐, CD플레이어, 공중전화, 필름 카메라, 여대생들이 매고 다니던 작은 배낭, 떡볶이 단추를 단 더플코트, 게스와 같은 미국 캐주얼브랜드 마크를 크게 박은 라운드티, ‘짜가’ 메이커 등 당시 유행코드도 섬세하게 되살려놔 마치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머릿속 기억이 그대로 영상화된 듯하다.
90년대 초반의 풍경과 감성을 고스란히 복원해놓은 이 영화의 주된 성공은 이를 소구할만한 동세대의 머릿수가 많다는 것에 근거하기도 한다. 국내 멜로영화 관객 동원 신기록까지 세웠다고 하는데, 한달여만에 300만명이 관람했다. 한 해 100만명씩 태어나 제2 베이비붐 세대라 불리던 70년대 초반생들, 인구가 원체 많다보니 뭘 해도 역대 최고 경쟁률을 피할 수 없어 ‘저주받은 92학번’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단군 이래 최악의 입시경쟁을 뚫고 겨우 소수만 대학에 들어갔다. 납뜩이처럼 한해 40만명의 재수생이 생겼고 밀려 밀려 장수생이 되고 결국 진학을 못하게 되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졸업할 무렵에는 IMF 경제위기가 닥쳐 사상 유례없는 취업난을 겪었다. 군입대 대상이 넘쳐 유독 ‘방위’로 불리던 보충역과 병역면제가 많았다는게 남자들에겐 유일한 혜택이랄까.
70년대 경제발전기 혜택을 입고 자라나 소비세대로의 전환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동세대 연예인들이 하고 나온 것들이 하나 같이 전례없이 ‘장사가 됐다’. 이승연 목걸이, 김남주 립스틱 등은 여전히 회자된다. 장동건, 고소영, 이영애, 김혜수, 고현정 등 70년대 초반생 연예인들이 40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CF모델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도 관리를 잘해서만이 아니다. 이들을 보고 지갑을 열 동세대의 수가 원체 많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해도 소비지향적 첫 세대라 할 수 있는 이들이 경제활동인구의 중추가 되면서 여전히 높은 소비력을 과시하고 있다.
‘건축학개론’은 전략적은 아니었을지라도, 이 세대를 극장으로 끌어들이면서 멜로 영화 관객동원의 새 장을 쓰고 있다. 기억 속 ‘고증’에도 뛰어나다. 90년대 초반, 열광할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