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했는데 경찰서나 검찰, 법원에 가질 않고 본인이 직접 나서 악당을 잡고 복수한다. 공권력은 도움이 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고 때론 방해를 놓기까지 한다.

TV와 스크린에 이런 '사적(私的) 복수' 스토리를 다룬 드라마와 영화가 넘쳐나고 있다. 올 하반기에 개봉과 제작을 기다리는 한국 영화 5~6편의 줄거리 뼈대가 모두 '개인의 복수'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추적자'와 '유령'도 마찬가지였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나 '아저씨'처럼 사적 복수를 다룬 영화가 해마다 한두 편씩 나오긴 했지만,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개인적인 응징'을 주제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건 이례적이라고 영화·방송 관계자들은 말한다. 공급은 수요가 있기 때문에 나오는 법. 실제 '추적자'와 '유령'은 20% 안팎의 높은 시청률을 올리며 성공했다. 왜 이 시점에 한국 영화·드라마계는 '사적 복수' 테마에 빠져들게 된 걸까.

쏟아지는 '사적 복수' 드라마·영화

22일 개봉하는 영화 '이웃 사람'은 어린 소녀를 죽인 연쇄 살인범을 동네 사람들이 붙잡는 얘기다. 조만간 개봉할 '내가 살인범이다'는 공소시효를 넘긴 연쇄살인범을 피해자 유가족과 담당 경찰이 응징한다는 내용이다. 한창 촬영 중인 '26년'은 광주민주항쟁의 '그'를 유가족들이 암살하려고 한다는 게 그 줄거리다. 드라마 '추적자'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악행을 감추려는 유력 대선후보를 경찰관이 끝까지 쫓아가 복수하는 내용이고, '유령'은 친구를 죽인 재벌 회장을 해킹이라는 불법수단까지 동원해 개인적으로 응징하는 스토리이다.

앞으로 제작에 들어가는 영화들 가운데 웹툰을 영화로 옮긴 '더 파이브'는 평범한 주부가 연쇄살인범에게 가족을 잃은 뒤 직접 범인을 찾아나선다는 얘기다. 딸을 잃은 아버지가 살인범의 아들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을 담은 베스트셀러 '7년의 밤'도 곧 영화로 만들어진다.

'더 파이브'의 웹툰 원작자이자 영화 감독인 정연식씨는 "우선 공권력에 대한 믿음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 나도 경찰이나 법원에만 모든 걸 맡겨서는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응어리가 잘 풀리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작품을 시작했다"고 했다. 동국대 영화학과 정재형 교수는 "강력 범죄와 비리 사건이 쏟아져 나오는데 수사와 처벌은 제대로 못하니까 대중이 사적 복수를 꿈꾸게 되고 영화와 드라마가 이런 세태를 담아 내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사회적 부조리'가 원인

한 영화제작사 대표는 '정권의 비리 사건이 계속 나오고 경제가 어려운 현실'을 지적했다. "대형 비리가 이어지면 권력에 비판적인 영화에 관객들이 호응을 한다. 그러나 권력에 희생된 사람들을 직설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사적 복수라는 틀을 가져와 스릴러물이나 법정물 형식으로 그들을 다루는 게 영화·드라마적 재미를 끌어올려 상업적으로도 효과가 있기 때문에 최근 개인적 복수 스토리를 다루는 드라마·영화가 한꺼번에 나오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몇년 전에 나온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나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도 사적 복수를 다뤘지만 거기엔 사회적 맥락이 담겨있지 않았다. 요즘 나오는 사적 복수 콘텐츠들은 오히려 지난해부터 나온 '도가니' '부러진 화살'과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담은 작품의 연장선상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2009년 드라마 '남자 이야기'가 사적 복수의 틀을 가져와 신도시 개발을 둘러싼 대기업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그렸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추적자'나 '유령'도 그때 나왔으면 화제가 안됐을 수도 있다"고 했다. "경제난 등 현재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상실감이 드라마·영화와 같은 콘텐츠에 반영되고 호응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