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가장 위협적인 무기는 카메라다."

미국의 포토 저널리스트 에디 애덤스가 유언처럼 남긴 말이다. 그는 1968년 2월 '사이공식 처형' 사진을 보도해 퓰리처상을 받은 AP 통신의 종군기자. 월남 경찰국장이 손이 뒤로 묶인 베트콩을 향해 무덤덤한 표정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셔터를 눌렀다.

전쟁에 대한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진 한 컷. 베트남전을 '자유' 월남과 '공산' 월맹 간의 대결구도로 몰고 가려했던 미국의 시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사진은 반전시위에 불을 지펴 미국은 이후 베트남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

4년 후 사진 한 장은 또 한 번 세계를 경악으로 몰아 넣는다. 이른바 '네이팜 소녀'로 불리는 사진 때문이다. 1972년 6월 8일 월남군의 공습으로 온몸에 중화상을 입은 아홉 살 짜리 어린이가 벌거벗은 채 절규하며 거리를 달리는 모습을 AP통신의 닉 우트기자가 카메라로 담아냈다.

사진 설명은 짤막했지만 그 어떤 빼어난 글보다 더 생생하고 치열했다. 겁에 질린 소녀가 울부짖으며 한 말은 꼭 두마디. "정말 뜨거워요 살려주세요."

사진은 전 세계로 타전돼 전쟁의 야만성과 비극을 고발했다.

1972년 들어서 베트남 사태가 갈수록 악화되자 닉슨은 극단적인 처방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원폭 투하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 그러나 이 사진으로 인해 미국은 핵 사용은커녕 베트남 철수의 수순을 밟게 된다. 최강의 군대가 흑백사진 두 장의 힘에 굴복하는 수모를 당하고 만 것이다.

'네이팜 소녀'는 기적적으로 살아나 평화의 전도자로 거듭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킴 푹. 14개월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미국인 의사의 수술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월남 패망후 그는 공산정권 하에서 반미·반제국주의의 아이콘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킴은 훗날 한인의 도움으로 캐나다에 망명, 이젠 서방세계에서 자유를 길게 호흡하며 살고 있다.

무려 열일곱 번의 수술로 인한 고통으로 세상을 증오했다는 킴. 쿠바 유학 중이던 1989년 관광객으로 온 베트남 남성과 만나 3년 뒤 결혼했고 현재 토론토 근교에서 아들 둘을 두고 그토록 염원했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네이팜 소녀'의 사진이 나온지 올해 40주년을 맞는다. 이제 중년을 훌쩍 넘긴 킴은 "나를 더 이상 전쟁의 상징으로 기억하지 말아달라"며 유엔의 친선대사로 변신,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평화를 호소하고 있다. 폭력이 있는 곳에 화해를, 독재가 있는 곳에 정의를 외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