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도 미룬 채 일에 빠져 사는 30대 '골드 미스'에게 '꿈의 집'이란 어떤 것일까.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화려한 펜트하우스? 아니면 교외의 우아하고 현대적인 타운하우스? 정답은 의외로 '몸과 마음이 편안한 집'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은퇴한 노부모가 있다면,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애틋하고 기특한 생각을 갖는 게 또 딸의 마음이다.
건축가 김영옥(45·로담건축 소장·사진)씨가 최근 설계한 경기도 가평군 회곡리 '산집'은 이런 화려한 골드 미스의 소박한 바람에서 출발했다. 경력 17년차 방송 작가 유진영(39)씨는 재작년 여름 "주말농장에 부모님과 함께 지낼 집을 짓고 싶다"며 피자 한 판을 들고 건축가를 찾아왔다. '전파견문록' '일요일일요일밤에' 등을 거치며 탄탄한 경력을 쌓아가던 유씨는 10여년 전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방송사 근처 서울 여의도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었다. 일 때문에 오피스텔에 거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자연 속의 집' 하나를 지으려는 요량이었다. 은퇴하고 서울 아파트 단지에 살며 가평 주말농장을 왔다 갔다 하는 부모님도 머물 수 있는 집이었으면 했다.
건축주의 요구는 명확했다. 첫째, 자연환경과 어울리는 소박한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둘째, 주말마다 들를 부모님이 머물 공간과 자기 공간을 분리했으면 한다는 것. 셋째, 부모님 공간에는 툇마루가, 자기 공간에는 서재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사항. 조경을 포함한 총공사비가 1억5000만원 미만이었으면 한다는 것.
건축가 김씨는 "의뢰를 받고 집터를 찾아가니 맞은편에 아름다운 화야산(禾也山)이 눈에 확 들어왔다"며 "산으로 둘러싸인 집터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우리 시골의 소박한 풍경을 현대적으로 번안해보고자 했다"고 했다. 연면적 120㎡(약 35평). 평당 공사비는 350만원이 들었다.
건축주 바람대로 이 집은 세 채로 나뉜다. 부모님이 쓰는 안채(45㎡)와 작가를 위한 책집(21㎡), 손님방(10㎡)이다. 건축가는 텃밭을 일구며 수시로 이곳을 찾는 건축주 부모님을 위해 안채에 간단한 주방과 거실, 그리고 침실을 배치했다. 침실과 거실 사이에는 옛날 창호 문살을 닮은 미닫이식 분합(分合)문을 둬 분리와 개방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했고, 안채 외벽 아래쪽에는 나무로 만든 툇마루를 달아 토속적인 공간으로 꾸몄다.
책집은 건축주 유씨의 작업 공간 겸 생활공간이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2층(1층·다락방)으로 구성돼 있다. 건축가는 1층과 다락방을 틔워 높이 6m짜리 책장을 짰고, 다락방을 사람이 서면 정수리가 닿을 듯한 낮은 침실로 삼았다. 유씨는 이곳에서 PD, 동료 작가들과 회의하거나 혼자 조용히 글을 쓰고, 밤이 되면 다락방에 요를 깔고 잠을 잔다. 손님방은 평상시 대체로 비어 있기 때문에 가장 작게 만들었다.
안채에 달린 툇마루에 앉으면 맞은편 슬라이딩 형식으로 만든 골강판 출입문이 보인다. 낮에는 이 문이 주 출입구지만 밤에는 안채와 손님방 사이에 있는 1m 남짓 벌어진 틈새가 출입구가 된다. "시골집 형식이라도 너무 개방적인 구성은 곤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붕에는 골강판을, 외벽에는 적벽돌과 시멘트 벽돌을, 툇마루 나무로는 방부목을 써 "시골집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친근한 느낌을 줬다"는 게 건축가의 설명이다.
우리네 옛날 아버지들이 대체로 그렇듯, 유진영씨도 사회생활에 바빴던 아버지와 별다른 대화도 하지 않고 자랐다고 한다. 자연히 부녀 사이는 서먹했다. 하지만 나이 든 아버지를 대신해 딸이 집을 설계하고 짓고 준공 허가를 받으며 뛰어다니는 동안 딸은 아버지 곁에 한 뼘 더 다가갔다. "저는 나름대로 머리를 식히려고 내려왔는데, 아버지가 매번 제게 그러세요. '얘, 여기 돌 좀 골라라!' '얘, 여기 잔디를 깔면 어떠니?' '진영아, 여기 나무 심는 것 좀 도와줘라'…. 제 손톱 좀 보세요. 하도 흙을 만져서 이렇게 됐다니까요." 훌쩍 큰 딸의 뭉툭한 손톱 끝에는 새까만 흙먼지가 촘촘히 끼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