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마뇽
브라이언 M. 페이건 지음|김수민 옮김|더숲|440쪽|1만8900원
"4만 년 전 빙하시대. 늦가을 아침 안개가 깔린 강가에서 털옷을 걸친 크로마뇽인 가족이 천천히 움직인다. 손에 창을 든 사냥꾼 남편과 말린 고기가 들어 있는 가죽 가방을 멘 아내, 그들의 아들과 딸. 갑작스러운 돌풍이 강 건너편의 어둠을 들어 올렸다. 순간 소년이 소리를 지르며 엄마 곁으로 달려간다. 우락부락하고 털이 무성한 얼굴이 강 건너편 덤불숲에서 조용히 이들을 주시하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한 네안데르탈인이다. 아버지는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창을 흔든 뒤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네안데르탈인의 얼굴은 다시 소리 없이 사라진다…."
신간 '크로마뇽'은 소설 같은 장면으로 문을 연다.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극적인 순간은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후자가 단순한 옷차림에 무기를 소지한 원시적 인류라면, 전자는 잘 발달된 뇌와 언어능력, 놀라운 인지능력을 가진 최초의 해부학적 현대 유럽인이었다. 두 종족은 유라시아에서 수 세대에 걸쳐 공존했다. 항상 서로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주시하며, 최소 1만5000년 동안 지구촌의 주인 자리를 놓고 경합했다. 결과는 크로마뇽인의 승리. 네안데르탈인은 약 3만년 전 멸종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크로마뇽인은 후기 빙하시대의 변화무쌍한 기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고고학계 세계적 석학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브라이언 페이건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가 쓴 이 책은 약 5만년 전 열대 아프리카 지역에서 시작해 1만5000년 전쯤 빙하시대가 끝난 뒤까지 계속된 '최초의 현생인류' 크로마뇽인의 위대한 여정을 담았다. 엄청난 환경적 도전, 추위와 포식자, 네안데르탈인의 위협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생생하게 펼쳐보인다.
◇창의력과 적응력
무한한 창의력과 적응력, 독창성과 순발력. 크로마뇽인에게는 있었고,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없었던 것들이다. 이 차이가 그들의 운명을 갈랐다. 저자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적절한 재료들로 각종 도구와 무기를 만들어낸 크로마뇽인의 능력에 주목한다.
특히 실을 꿸 수 있게 귀가 뚫린 '바늘'은 불의 사용에 비견할 만한 인류 최고의 혁신이자 발명이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을 듯한 이 작은 도구가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 수만년 동안 네안데르탈인들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망토처럼 동물의 가죽을 몸에 걸쳤다. 하지만 크로마뇽인은 바늘을 이용해 몸에 꼭 맞는 여러 겹을 덧댄 옷을 만들었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현대 아웃도어 장비를 파는 곳에선 겹겹으로 된 보호장비를 마치 놀라운 발명품인 것처럼 팔고 있지만, 이런 장비는 크로마뇽인이 진작에 사용한 것이다."
크로마뇽인은 일년 중 대부분 기간 동안, 옷을 여러 겹 입고 겉에 가벼운 파카를 걸쳤는데, 이렇게 하면 열이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또 열이 올라 땀이 차면서 체온을 떨어뜨리는 현상도 방지할 수 있다. 반면 네안데르탈인들은 겹쳐 입는 맞춤옷을 만들지 못했던 것이 북유럽 평원에서 일정기간 이상 거주하지 못했던 이유일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현대 스위스 아미(Swiss Army) 칼에서도 크로마뇽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많은 크로마뇽인들은 몸체가 되는 돌, 즉 몸돌(石核·core)을 지니고 다니면서 특별한 도구가 필요한 상황이 오면 격지(돌 파편으로 만든 조각)를 떼어 내 사용했다. 크로마뇽 석공들은 새기개·긁개 등 다양한 모양의 격지를 제작했는데, 다목적으로 사용된 이들 도구에서 몸체 하나에 여러 가지 도구가 들어 있는 스위스 아미 칼의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성
유창한 언어능력과 인지능력, 풍부한 영적 생활도 크로마뇽인을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했다. 네안데르탈인과 달리 이들은 상상력을 동원해 노래와 이야기, 주술의식으로 그들이 사는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 그들은 조각가였고 화가였으며 판화가였다. 3만 년 전 동굴에 벽화를 그려넣을 만큼 상징적 기호에 능숙했고, 뼈와 뿔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 정도로 상상력과 응용력 또한 뛰어났다. 라스코와 알타미라, 쇼베 등의 동굴 벽화에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장 유명하면서도 위대한 곳은 라스코 동굴. 1940년 프랑스 도르도뉴의 몽티냐크 근처에서 어린 소년들이 토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아이들은 자기네 개가 지하에서 짖는 소리를 듣고 사다리를 가져와 타고 내려가다 거대한 황소 그림과 맞닥뜨렸다. 질주하는 말과 오록스, 정교한 뿔을 가진 수사슴…. 수세기에 걸쳐 그려지고 다시 겹쳐 그려진 600여점의 동물 그림은 발자국 소리까지 들리는 듯 생생하다.
불과 18년 전인 1994년엔 프랑스 남동쪽 아르데슈 계곡에서 쇼베 동굴 벽화가 발견돼 고고학자들을 흥분시켰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연대는 라스코 벽화보다 앞선 약 3만6000년 전. 저자는 기후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의 초자연적 믿음과 복잡한 상징주의가 완벽하게 나타나 있는 벽화라고 감탄한다.
◇상호 협동과 유연함
크로마뇽인에겐 사냥과 채집은 물론 이주할 때도 '협동'이 기본이었다. 협동 능력은 생존에 필수 태도였다. 그들만의 지혜와 상호 협동, 유연함을 배워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결국 이것. "그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살았고 도전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인간이 가진 독특한 적응력과 창조력, 기회주의적 특성에 의존했다. 우리는 먼 과거에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과학적 지식과 고고학적 팩트를 바탕으로 흥미진진하게 풀어간 대중 고고학책.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현생인류의 삶이 이웃처럼 가깝게 다가온다. 다채로운 컬러 화보로 실린 동굴 벽화 그림들이 선명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