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판이 의미 있는 것은 '날개' 아이템 때문이죠. 게임 속 제 캐릭터에 날개가 생기는 거예요. 부러움의 대상이 될 거예요."

한모(20·대학생)씨는 지난 12일 밤부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미국 게임회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이하 블리자드)가 14일 오후 5시 서울 성동구 중앙선 전철 왕십리역 앞 광장에서 여는 액션 롤플레잉(role-playing·역할극) 게임 '디아블로3' 출시 기념 전야제에 참석하지 못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13일 오전 5시 30분쯤 서울 성북구 집에서 나온 한씨는 지하철 첫차를 타고 오전 6시쯤 행사 장소에 도착했다. 줄이 없는 것을 확인한 한씨는 주변을 배회했고, 이 사이에 조모(22·대학생)씨가 와서 먼저 줄을 섰다. "꼭 첫 번째로 한정판을 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한씨는 14일 오후 5시 35시간째 광장에 서 있었다. 끼니는 주변 편의점에서 때웠다.

14일 오후 5시쯤 서울 왕십리역 광장에 한씨 같은 '디아블로 마니아' 4000여명이 몰렸다. 마니아들은 13일 오전부터 모이기 시작해, 13일 오후 11시쯤에는 500여명, 14일 오전 11시쯤에는 3400여명이 모였다. 14일 오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서 사람들은 우산을 쓰거나 우의를 입고 줄을 섰다.

미국 블리자드사(社)가 개발한 게임 디아블로3의 출시(15일 0시)를 하루 앞둔 14일 출시 전야제와 디아블로3 한정판 판매가 예정된 서울 지하철 왕십리역 광장에 4000명 넘는 사람이 모여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선착순 100명 중 1명을 추첨해 80만원 상당의 최고급 그래픽 카드를 제공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디아블로3 한정 소장판에 있었다. 한정 소장판에는 '날개' 같은 게임 아이템뿐만 아니라 제작 현장 뒷이야기가 담긴 DVD, 디아블로3 사운드트랙 등이 들어가 있다. 박모(32·무직)씨는 "난 '한정판 구입한 사람이다'라는 것이 인증되는 셈"이라고 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직장에 거짓말하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회사원 홍모(30)씨는 "어제 새벽 1시에 친구와 함께 나와 줄을 섰다가, 아침에 회사 가서 얼굴 도장 찍고 다시 왔다"고 말했다. 블리자드 로고가 적힌 버스가 지나가자 쓰고 있던 우산을 던진 채 달려나가 동영상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난 8일 한 아르바이트 구인 사이트에서는 "디아블로3 구매해 줄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 급여는 5만원"이란 글도 올라왔다.

디아블로3 한정판을 사기 위해 서울 지하철 왕십리역 광장을 찾은 사람들이 비가 오는 가운데 비옷을 입고 잠을 자고 있다.

게임 분야 파워블로거인 한 여성이 지난 13일 오후 왕십리역 앞 광장에 텐트를 치자, 주민들이 "공공장소에서 텐트를 치면 되느냐"며 민원을 넣으면서 '텐트녀'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여성은 결국 계속되는 경찰의 요구에 자진해서 텐트를 철거했다. 지난 11일에는 한 게임사이트에 칼 사진과 함께 "(전야제 행사 때) 새치기하지 말라", "행사 때 옆구리를 조심하세요"라는 글을 올린 '칼빵맨' 이모(26)씨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이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도 있다. 박모(여·62·성동구 행당동)씨는 "게임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다니 황당하다"고 했고, 한 주민은 "행사가 시작되자 환호하는 모습이 광신도같이 보였다"고 했다.

한상린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신제품이 출시되면 큰 이벤트를 벌여서 홍보 수단으로 삼는 게 블리자드의 전통적인 스타일"이라며 "국내 게임시장 규모를 볼 때 4000여명이 평일에 모였다는 것은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고 했다. 모두 미국 기업의 상술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다.

☞디아블로

블리자드가 출시한 게임 '디아블로'는 게임 이용자가 게임 속 한 인물의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 '역할수행게임(RPG)'의 기원으로 통한다. 유혈 장면, 잔인한 신체 훼손 표현 등으로 논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