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어느 겨울 오후, 나는 서울 신월동 중고자동차 거래소의 한 정비공장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자동차를 수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두 달째 주말마다 반복되는 일과였다. 정비공장 기술자들은 '멀쩡한 직장인이 기름 묻히는 곳엔 왜 왔나?' '며칠 나오다 제풀에 지쳐 떨어지겠지' 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묻지도 가르쳐주지도 않는 몇 달이 지나갔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와 버티는 '자세'를 인정받았는지, 근 6개월 만에 "엔진오일 한 번 갈아볼 테요?" 하는 말을 들었다. 본격적인 '주말 견습' 생활의 시작이었다.

나는 LG패션에서 마케팅·홍보 업무를 맡고 있다. 각종 화보 촬영에서 프로스포츠 협찬까지,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해지스' '마에스트로' 같은 브랜드를 대중에 알리는 것이 내 일이다. 지난해 MBC의 '무한도전' '위대한 탄생' 등의 프로그램에서 해지스가 PPL(간접광고)을 했는데 그게 바로 우리 팀의 작품이었다. 요즘은 2012년 브랜드 홍보의 콘셉트를 설정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어느덧 직장 생활 14년차이고, 회사도 몇 번 옮겼다. LG패션 이전에는 미래에셋증권에서 홍보팀장을 했고, 그보다 더 전에는 LG상사에서 해외영업을 맡았다.

지난 주말 이상호씨가 서울 영등포의 한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자동차 바퀴를 떼어낸 뒤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직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내가 자동차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따겠다는 '포부'를 품은 데는 사연이 있었다. 2009년 봄 좋아하던 선배가 잘 다니던 회사에서 권고퇴직을 당했다. 그 선배는 대학생 딸, 고3 아들을 둔 가장이었다. 회사 생활에만 길들여진 선배가 퇴출된 이후 방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충격을 받았다. 우리 세대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정신없을 때 IMF 외환위기가 터졌고, 직장에 들어온 이후에는 '삼팔선'(38세에 조기퇴직)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것을 지켜보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도 그다지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선배의 일을 겪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 마시고 골프치면서 내 삶의 중요한 시기를 낭비하고 있었구나.'

당시 나는 자전거에 취미를 붙여서 기계 조립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낯선 세상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자동차 정비기능사 관련 수험서를 뒤적이다가 '나도 한번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을 다니기 여의치 않아 독학을 선택했다. 퇴근 후 밤늦게까지 공부하면서 '나에게 이런 열정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달 후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총 60개 문항 중 37개를 맞혀 겨우 통과했으니 운도 따랐다. 아내는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내 근황을 들은 장인의 주선으로 실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한 자동차 정비소를 소개받았다.

직장인 LG패션에서 마케팅 회의를 갖는 모습.

주말마다 어깨너머로 배우는지라 실력이 빨리 늘지는 않았다. '불줄'(차량 내부를 비추는 전등)을 잡아주고, 옆에서 대기하면서 공구를 집어 줄 때는 '가다'니 '메가네'니 육각스패너의 여러 종류를 뜻하는 일본말을 몰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합격요령만 가르치는 학원과 달리 직접 고장 난 차를 앞에 놓고 배우기 때문에 꼼꼼하게 배우고, 장인정신 같은 것을 함께 익힐 수 있었다. 실기 합격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2010년 3월부터 시작해 4번을 떨어지고, 5번째 응시한 작년 6월에 합격했다.

자동차 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따면서 나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기계는 정직하다. 어딘가 이상이 있으면 문제가 발생하고, 원인을 찾으면 답이 나온다. 그렇게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이 생겼다. 또 기계를 만지면서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됐다.

어렵게 자격증을 딴 뒤 실습했던 정비공장에 주말마다 나가서 일한다. 벽에는 내 기능사 자격증이 떡하니 걸려 있고, 정비공장에서도 기술자 대우를 해준다. 직장에는 정비기능사 자격증 딴 것이나 주말마다 일하러 가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직장에 소홀해지지 않으냐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경우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직장은 경쟁과 스트레스의 대상이 아니라 시너지를 일으키는 곳이 되었다. 실제로 주중에 회사 업무를 볼 때 과거에 비해 더 집중력이 생긴 것 같다.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와 자기 자동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면 대답해주는 것도 이전에는 몰랐던 즐거움이다.

나는 단순히 자동차 정비뿐 아니라 자동차라는 분야를 통해 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어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돼서도 자동차 관련 일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여름휴가를 미뤘다가 파리 모터쇼에 다녀오기도 했고, 해외 전문지도 두 권을 정기구독 중이다. 작은 성공이지만, 자동차 정비기능사 자격증은 이렇게 내 삶을 확장시켜 주고 있다. 당분간은 이 '이중생활'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