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정한 아이가 여호 잡는 폭발약으로 인하야 무참하게도 죽엇다는 데… 여호를 속이려고 은어 속에 너흔 폭발약을 은어로만 알고 '나도 하나 주어요'하고 빼앗아 다라나면서 입에다 너코 깨물어 폭발되어…"(1927년 2월 18일자)

여우 잡는 폭발약에 어린이가 횡사했다는 이 같은 소식은 1920년대 후반 이후 조선에 끊임없이 등장했다. 함남 단천에서 '여우 잡는 약에 사람이 중상'(1925년 4월 1일자), 경기도 안성에서 '폭약을 과자로 알고 투식(偸食·훔쳐 먹음)하다가 중상'(1926년 4월 1일자), 부산에서 '여호 잡으랴다 제 목숨 일허'(1927년 2월 1일자), 달성에서 '여우를 잡으러 나갔다가 그 폭약에 자기가 죽었다'(1926년 12월 2일자), 평남 성천에서 '여호를 잡다가 3인이 질식 몰사'(1931년 1월 7일자)….

여우 사냥용 폭약을 과자로 알고 훔쳐 먹다가 중상을 입은 사건을 보도한 지면(1926년 3월 10일자)과 겨울이 되면 '털시대'를 맞아 너도나도 여우 목도리를 두른 여성을 그린 안석영의 만평(1932년 11월 24일자).

여우사냥 사고가 속출한 것은 여우 가죽이 고가의 사치품으로 '모던 껄'의 사랑을 받아 수요가 넘쳤기 때문. '목아지가 잇대야 지지리 못난 넉두리나 목구녕으로 내지르는 시체(時體·유행) 녀자의 목아지가 무슨 갑시 잇스리야만은, 목도리는 사오십원 이상의 노릿내 나는 여호털목도리'요, '여호가 껍질만 남어 아모리 어엽분 녀자의 목을 얼사 안엇기로 사럿을 때 그 고기 내음새만 하랴만은, 여호털이 아니면 목에 걸치지 앗는 그 여호가튼 맘을 모를 일'이었다.(1933년 10월 25일자)

조선일보에 만평을 그린 안석영은 1932년 11월의 '가두풍경'을 '털시대'로 규정하고 이렇게 적었다. "겨울이 왓다. 도회의 녀성이 털보가 되는 때다. 여호털, 개털, 쇠털, 털이면 조타고 목에다 두르고 길로 나온다. 구렝이도 털이 잇다면 구렝이 가죽도 목에다 둘럿슬가"(1932년 11월 24일자) '거처하는 곳의 벽마다 빈대피 난초 그림과 뚜러진 장판을 바르지 안코 이불 요밋헤서 구데기가 나도' 개털목도리라도 하고 길로 나서야 '첨단여성'이었으니(1933년 10월 25일자), 한겨울 경성의 거리 풍경을 '털시대'라 할 만도 했다.

털 가운데 최고는 단연 여우였다. 그래서 '천여원짜리(당시 쌀 1가마 17원) 은호(銀狐)껍질로부터 싸서 십멧원짜리 가짜 여호 껍질까지, 여간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갑'이었지만, '허영심이 만흐신 안악네들로서 가장 애닯고 안타까운… 또 가장 씸쯩나고 약이 오르는 철' 겨울이 오면, '어듸서 어떠케 햇는지 여호털로 목을 두루고 거리를 거니는 안악네의 수효가 늘면 늘엇지 줄지 안고' 있었다.(1936년 12월 3일자)

'유한 매담의 허영심을 끌어오는 여호 목도리'는 1938년 일제의 수출진흥정책에 희생되어 판매가 금지됐다.(1938년 8월 26일자) 그럼에도 전시하 '국민정신총동원 경성연맹'이 제시한 36개 생활개선 실천 항목 가운데 조선일보가 첫 번째로 꼽은 것이 '가정부인들은 여호목도리를 하지 말 것'일 정도로(1939년 10월 29일자), 당시 여우 목도리는 부와 사치의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