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도심 노빈스키불바르에 있는 쇼핑몰의 21층 칼리나 바. 요즘 모스크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이곳에선 지난달 21일 밤 파티가 벌어졌다. 검정 드레스 차림의 스베틀라나 키로바(21)씨에게 "올해가 소련이 해체된 지 20년 되는 해인 걸 아느냐"고 물었더니, "소련?" 하고 되물었다. 그러더니 "부모님한테 듣긴 했지만 그 시절에 대해선 잘 모를 뿐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바 안의 젊은이들은 미국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서커스'란 곡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도시에나 있을 법한 분위기였다. 키로바씨는 "우린 러시아 노래보다 서방 국가의 음악이 더 몸에 맞는다"고 말했다. 다른 테이블에서 만난 러시아 고등경제대학 학생 나탈리야 아브라모바씨도 "이따금 거리 간판에서 마주하는 '소비에츠키 소유즈(소련)'란 단어가 낯설다"고 했다.
1991년 소련 해체를 전후해 태어난 러시아의 10~20대는 사회주의를 잘 모른다. 서방에 적대적이었던 소련 사회주의 70년간 '반(反)서구, 반(反)자본주의' 사고가 몸에 밴 기성세대와는 다르다. 러시아 사회학자들은 이들을 'P세대'라고 부른다. P는 소련 해체 전 합법적으로 수입된 최초의 서방 제품 펩시콜라의 이니셜이다.
모스크바국립대 대학원생 베라씨는 20대 초반과 30대 대학원생들이 모여서 수업을 하면 이런 세대 차이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했다. 그는 "30대 이상은 소련 시절의 집단주의식 토론에 익숙해 자신들을 '므이(우리)세대'라고 생각하고, 개인을 중시하는 P세대는 스스로를 '야(일인칭 주어 나)세대'라고 부른다"고 했다. P세대는 모임보다는 컴퓨터를 두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다고 한다.
미하일 마르티노비치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교수는 "P세대는 서방의 힙합이나 MTV 음악을 좋아하고 시장 친화적"이라고 말했다. 또 그들은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며, 정치보다는 경제나 사회 이슈에 더 관심이 많다고 했다. 러시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P세대는 러시아 인구 1억4290만명 중 약 13%인 1870만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요즘 러시아에서 P세대라고 하면 펩시콜라 세대 중에서도 블라디미르 푸틴(Putin) 총리를 지지하는 젊은이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들은 푸틴의 영향을 받아 반서방과 러시아 애국주의 성향을 보인다.
☞ P세대
P는 펩시(Pepsi)콜라의 이니셜이다. 1991년 소련 해체를 전후해 태어나 개인적인 경향이 강하고 IT(정보기술)에 익숙하며 친(親)서방, 친시장 성향을 보인다.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 빅토르 펠레빈(50)이 1999년에 쓴 소설 '파칼레니예(세대)'에서 규정한 개념으로, 이 소설이 크게 히트하면서 널리 쓰이게 됐다.
지난 10월 23일 청년 단체 '나시(Nashi)' 회원 300여명은 푸틴 총리의 집무실이 있는 정부청사 앞에서 크렘린(대통령 집무실)까지 '오늘 푸틴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구호를 내걸고 행진을 했다. 이들은 또 "정부가 반부패 투쟁에 나서야 한다"며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에서 '벨르이 파르툭(흰색 앞치마란 뜻으로 부패 없는 깨끗함을 상징)'이란 행사를 열었다. 한 시민은 "푸틴이 부패 척결을 내세워 왔지만 관료주의 벽에 막혀 잘 실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청년들이 여론 몰이를 해 푸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친위 집회"라고 말했다.
2005년 설립된 나시는 10대 후반~20대 중·후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회원 25만명을 두고 있다. 모스크바 카네기센터의 애널리스트 마리아 리프만씨는 "2000년 이후 사회학적 개념의 P세대 안에 또 다른 P(푸틴)세대가 생겨났다"면서 "나시 같은 단체는 소련 시절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던 '콤소몰'의 21세기 버전(version)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P세대가 이념적으로 분화된 배경을 소련 해체 후 정체성 부재(不在)에서 찾는 학자가 많다. 새로운 러시아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해야 그런 시스템이 유지되는지에 대한 국가 차원의 확고한 신념이 없어 젊은이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 평론가 올레그 카신씨는 "푸틴 정부가 내세우는 모토는 '브피료트(전진)!'인데 어떤 방향으로 전진할지 좌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해 이런 이념적 분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