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 웨이하이 청산터우에 있는 진시황제 동상.

진시황평전

장펀톈 지음|이재훈 옮김|글항아리|1152쪽|4만8000원

"중국사에서 진정으로 일을 한 사람은 진시황이고 공자는 빈말만 했다. 수천년 이래, 겉으로 보기에는 공자가 행했지만, 실제로는 진시황을 따라 행한 것이다." 모택동은 역대 제왕 가운데 진시황을 높이 평가했다. 현대 중국으로 이어지는 통일 중국의 원형을 처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문자·도량형 등 각종 제도를 통일한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낮에는 옥사를 판결하며 밤에는 문서를 열람했고, 스스로 처리할 공문의 양을 1석으로 정했다"는 한서(漢書)의 기록은 진시황에 적대적인 후속 왕조에서도 그가 정무에 충실한 근면한 군주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진시황(BC 260~210)에겐 수많은 지식인을 죽이고 책을 불태운 폭군의 이미지가 강하다.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짓느라 백성들을 괴롭게 한 '죄목'도 있다. 진시황 당대부터 그를 둘러싼 평가가 엇갈렸고, 이런 논쟁은 200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장펀톈(張分田·63) 톈진(天津) 난카이(南開)대 교수는 당대 중국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진시황에 대한 도덕적 단죄를 뛰어넘어 객관적 평가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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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통일 제국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책사와 맹장을 모으는 데 탁월한 용인술을 발휘했다. 초나라 출신 정치인 이사(李斯), 위나라 출신 군사전문가 위료(尉��), 황제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제나라 사람 모초(茅焦), 탁월한 외교능력을 발휘한 위나라 사람 요고(姚賈)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나라 밖에서까지 인재를 취했다. 이 가운데는 평민이나 도적 같은 비천한 출신까지 있었지만, 재능만 있으면 가리지 않고 발탁했다. 훗날 외교 참모가 된 돈약(頓弱)은 진시황이 만나고 싶어하자 "제왕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을 의로 삼고 있다"며 고집을 부렸다. 진시황은 제왕의 위신이 손상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돈약을 만나 외교 사절로 임명할 만큼 개방적 군주였다.

진시황은 법가(法家)로 알려져 있지만, 제자백가의 사상까지 탄력적으로 수용한 잡가(雜家)적인 군주였다. 20세기 중국의 대표적 역사학자 궈모뤄(郭沫若)는 진시황의 정신은 가혹한 형벌과 법령의 관점에서 보면 법가이고, 미신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선가(神仙家)이며 강력한 추진성을 보면 묵가(墨家)라고 했다. 유가·음양가·도가의 성격이 있다는 학자도 있다. 진시황의 이런 잡가적 성격은 중국 고대 주류(主流) 문화의 특징으로 역대 왕조에서도 이어졌다. 겉으로는 왕도(王道)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패도(�f道)를 기반으로 한 법치로 제국을 통치한 게 그렇다.

진시황이 이후 중국 역사에 남긴 영향은 압도적이다. 최초의 통일 제국 건설자일 뿐 아니라 그가 출범시킨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와 법치는 2000여년간 면면히 이어졌다. 1975년 후베이성 윈멍현(縣)에서 출토된 진나라 시대 죽간(竹簡)에는 진시황 당대 법률이 기록돼 있는데, 한나라가 진의 법치를 비난하면서도 그대로 계승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한나라는 의례와 역법, 풍속까지 진나라를 그대로 베꼈다.

저자는 진시황의 폭정으로 손꼽히는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분서'는 진(秦)나라의 대표적 정치제도인 군현제(郡縣制)와 법치(法治)에 대해 주(周)나라를 기준으로 비판하는 정치세력을 제압하고 사상을 통일함으로써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뤄진 조치라는 것이다. '갱유'란 표현도 정확하지 않고 '갱술사'라고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경전을 불태우고 술사를 묻어 죽이는 과정에서 유가(儒家)가 심각한 손실을 보았지만, '사기'에 따르면 술사를 포함한 '제생(諸生)'들은 진시황에게 불사(不死)의 약을 구해주겠다며 국고를 낭비했을 뿐 아니라 황제를 비방했기 때문에 처형됐다. 진시황은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어사를 파견해 심문을 거쳤고, 법률에 따라 위반자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분서갱유'는 전제 군주정치에서 흔히 있었던 통치행위였다는 변호다.

명말 청초 사상가 왕부지(王夫之)가 "군현제는 2000년간 바뀔 수 없었다"고 했고, 청말 사상가 담사동(譚嗣同)이 "2000년간 지속된 정치는 진(秦)의 정치이며 모두 큰 도둑이었다"고 한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국이 진나라에서 비롯됐다고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방대한 기술이 치밀하지는 않지만 진시황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보여주는 단서가 풍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