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강도 혜산시는 한 집 건너 한 사람이 남한으로 망명할 정도로 탈북자가 많이 발생하는 곳이다. 평양 등 내륙에서 탈북하는 사람들도 주로 평양과 혜산을 거쳐 중국 지린(吉林)성 창바이(長白)로 넘어가는 코스를 택한다. 혜산시는 많은 탈북자가 직·간접으로 경험하게 되는 특별한 국경도시인 셈이다.
타지역보다 외부 정보에 밝고 반(反)김정일 성향이 강한 혜산 출신 탈북자들은 한국에 입국해서도 북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대북 전단을 북한에 보내는 운동을 주도하면서 김정일 정권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된 박상학 자유북한인연합 대표가 대표적인 혜산 출신이다. 박씨는 대남공작부서에 근무하던 부친이 일이 잘못되자 주저 없이 가족 모두를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탈북한 경우다. 함께 탈북하지 못한 삼촌은 반역죄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부터 김정일 정권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고 그 정권이 하루빨리 무너져야 할 정권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전단을 북한에 보내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 북한 체제가 무너지는 첫 변화가 있다면 양강도 혜산시나 평북 신의주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NK지식인연대 사무국장인 도명학씨도 혜산 출신이다. 그는 보위부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 거의 사망 직전에 이를 만큼 위험한 상황에서 탈북한 사람이다.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혜산에서 작가활동을 한 그는 "양강도 혜산은 북한에서도 아주 특별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1979년부터 혜산 사람들은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는 혜산을 '밀수의 고향' '장사의 고향'이라 부릅니다."
외부 세계에 일찍부터 눈을 뜬 혜산 청년들은 중국에 한 번쯤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장사에 열을 올렸고, 혜산 처녀들은 "압록강을 한 번도 넘지 않은 남자는 남자가 아니다"고 할 정도로 남자를 고르는 눈이 각별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혜산이 있는 양강도는 '도당 책임비서의 무덤'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김정일 정권이 통제하기 힘든 지역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1998년경 연형묵 전 총리가 추천한 인물이 김정일의 비준을 받고 양강도를 통제하기 위해 당 책임비서로 부임한 적이 있다. 당시 김정일은 "당신이 실패하면 내가 갈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책임비서는 양강도 도착 순간부터 시장을 통제하고 사람들을 마구 잡아가면서 혜산 시민들 제압에 나섰다. 그러자 시민들은 "어디 어방동이(뜨내기) 같은 놈이 굴러와서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며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잡아가도 시민들에 대한 통제가 여의치 않자 그는 결국 김정일에게 인민군 보위사령부가 직접 내려와서 시민들을 제압해줄 것을 요구했고, 당시 인민군 부대가 혜산시 전체를 삼중으로 포위하고 이 잡듯 사람들을 족쳤다. 당시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민군을 끌어들였던 당 책임비서 역시 혜산시 토착 간부들이 그의 비리를 보위사령부에 일러바치면서 보위부에 체포됐다. 그때 혜산 시민들은 "이제 김정일이 직접 책임비서로 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통쾌해했다고 한다.
탈북 여성으로 첫 박사가 된 북한음식문화원 이애란씨도 혜산 출신이다.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의 죄 때문에 혜산으로 추방된 경우다. 이씨는 "혜산시를 비롯한 양강도 지역은 평북 신의주보다 출신성분이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며 "일찍부터 외부 정보에 눈이 떠진 혜산 시민들은 김정일이 아무리 통제하고 짓밟아도 잔디처럼 다시 일어서는 강인한 기질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씨 역시 "광복 이후 북한에서 일어난 폭동 가운데 신의주 학생운동과 양강도 갑산 봉기가 있었는데 아마 북한에서 첫 변화가 일어난다면 이 두 도시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입력 2011.08.3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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