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63)은 말이 없었다. 화가에게도 일절 말을 걸지 않고, 작업실에 놓인 감 그림만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감들은 등불이 켜지듯이 나뭇가지에서 스스로 발화하는 빛처럼 켜져 있다. 오치균이 보여주는 등불의 질감은 강력한 육체성이다. 오치균의 색은 움직이는 살이나 뼈와 같다. 기골(氣骨)이 꿈틀거리고 혈육(血肉)이 느껴진다. (…) 그의 색은 몸으로 주물러서 빚는다. 주물러서 나오는 색으로 하늘과 가지와 열매를 그려냈으니 생물의 실촉(實觸)이 또한 무성할 수밖에 없으리라."

'칼의 노래'를 쓰기 전 아산 현충사 이순신 사당의 큰 칼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던 때처럼 김훈의 시선을 작품에서 뗄 수 없도록 만든 화가는 지두화(指頭畵·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그린 그림)를 하는 화가 오치균(55)이다. 김훈이 남긴 글은 오치균의 도록 서문으로 들어갔다. 강원도 사북 폐광촌 풍경을 청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어두운 터치로 그려낸 2007년 '사북'전 때도 김훈이 서문을 썼다.

오치균의 2011년작‘감’.

오치균 개인전 '감'이 내달 20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전시회에 나온 작품 열 점은 모두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감나무들이다.

화가는 고향인 대전 인근의 감나무를 종일 관찰했다. 새벽에서 아침, 아침에서 점심…. 햇볕의 농도에 따라 변하는 하늘 빛깔과 감 빛깔의 미묘한 차이를 예리하게 짚어내 화면에 옮겼다. 여명(黎明)에 사물의 빛은 짙어진다. 그래서 새벽녘 하늘빛은 청회색이고, 감빛은 진주홍으로 탁하다. 낮에 사물의 빛은 옅어진다. 낮의 하늘이 맑은 옥색, 감빛이 밝은 주홍인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그림의 감나무들은 생령(生靈)이라도 된 양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 그려 거칠고 기이한 생물처럼 보이는 나뭇가지들이 당장이라도 보는 사람을 덮칠 듯한 기세다.

유년 시절의 화가에게 '감'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동의어이자 돈벌이의 수단이었다. 그는 매년 가을 마당의 감을 따서 어머니와 장에 나가 팔았다. 어머니는 "감 사세요!" 외쳤지만, 오치균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 상경하면서 고향과 이별한 오치균은 이번 전시 도록에 실린 에세이에서 "그렇게 지겨웠던 감나무와의 투쟁이 아직도 계속됐다면 난 감을 먹지도 않을 테고 감히 사치스럽게 그것을 화폭에 담을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예민한 성정의 화가는 현재 사람과의 만남을 꺼린 채 두문불출하고 있지만, 그가 그린 감은 화가의 육성 없이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02) 519-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