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글항아리|432쪽|2만3800원
지난해 해외여행자 수는 1500만명. 하지만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까지만 해도 '여권=특권'이었다. 하물며 조선 시대임에랴. 이 책은 여말선초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12가지 이국 체험을 한데 묶었다.
'천자의 나라'에 바쳐질 운명으로 이역만리길에 올랐던 공녀(貢女), 풍랑을 만나 본의 아니게 중국 강남까지 '자유여행'했던 선비 최부, '돈 업스면 이태리니 불란서니 어대어대를 다 엇더케 다녀 왓스랴'라며 세계 명소를 여행했던 신여성 나혜석(1896~1948) 등 사연은 저마다 별스럽다.
1896년 민영환(1861~1905) 일행이 '대비달자(大鼻澾子·코 큰 오랑캐)의 나라' 러시아의 황제 대관식에 초청받아 가는 길이었다. 동행했던 윤치호(1865~1945)는 일기에 이렇게 쓴다. "Mr. Min은 전형적인 조선의 '양반'이다. 그는 모든 일에 하인의 봉사를 필요로 한다. 옷을 입고 양말 신는 일, 코트의 단추를 채우는 일조차도 말이다. 나는 그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잠자고 먹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중국어 역관으로 동행했던 김득련의 말도 거침없다. "양반네 잔칫상에 웬 쇠스랑과 장도(나이프)가 등장하는가? (…) 이상한 색깔이지만 눈 하나는 시원한 서양의 요조숙녀들, 어찌 그리 요란한 옷을 입고 있는가? 내 얼굴이 잘생겨서일까, 아니면 남녀칠세부동석을 몰라서일까? 거침없이 군자의 옆자리에 다가와 재잘대누나." 러시아 발레를 보고는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 빙빙 돌기도 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데, 가녀린 낭자를 학대하다니, 서양군자들은 참으로 짐승"이라고 평한다.
그밖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년)와 조선시대 중국어교재인 노걸대(老乞大), 첫 근대신문 '한성순보'에서 당대의 세계인식을 끌어낸 기획 솜씨가 돋보인다. 모름지기 인문학이란 텍스트와 해석의 만남임을 보여주는 책.
입력 2011.07.0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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