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이만큼 잘 그리진 못할 거야. 안 그래?" 1961년 어느 날 어린 아들이 화가인 아버지에게 미키마우스 만화책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들의 말에 자극받은 아버지는 당장 미키마우스와 도널드 덕이 함께 낚시질을 하고 있는 그림을 그린다. 실제 만화처럼 말풍선도 넣고, 인쇄물 특유의 망점(網點)까지도 세밀하게 표현했다.

아들을 위해 그린 그림 '이것 좀 봐 미키(Look Mickey)'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 화가가 바로 미국 팝아트(Pop Art)의 대표작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1923~1997)이다. 그전까지 추상표현주의 작업을 해 왔던 리히텐슈타인은 이후 만화를 작품의 소재로 채택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유명해졌다. 각각 삼성과 오리온 그룹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행복한 눈물'과 '스틸 라이프(Still Life·정물)'가 바로 리히텐슈타인의 작품들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이렇게 세간의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의 작품이 세계적 컬렉터들의 주목거리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1973년작‘크리스털 그릇이 있는 정물’(사진 왼쪽)과 리히텐슈타인의 1977년작‘금붕어 어항’. /ⓒEstate of Roy Lichtenstein

9월 25일까지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미국 휘트니미술관 소장품전 '이것이 미국미술이다'는 세계 현대미술의 권력 축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는 '혁명의 순간'을 실물로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리히텐슈타인은 아동·청소년이나 즐기는 '저급한 문화'로 여겨졌던 만화를, 앤디 워홀(Warhol·1928~1987)은 미술 축에도 끼지 못하던 상업 포스터를 고급 예술인 '회화(繪畵)'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만화나 상업 포스터 모두 대량생산·대량소비라는 미국 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특성이었으며 이들 작가가 개척한 새 장르는 '팝아트(Pop art)'라 불리고 있다.

'이것이 미국미술이다'전에서는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두 점을 만날 수 있다. 리히텐슈타인이 1970년대에 몰두했던 '스틸 라이프' 시리즈 중 하나인 '크리스털 그릇이 있는 정물'(1973)과 브론즈에 페인트를 칠한 설치 작품 '금붕어 어항'(1977)이다. '크리스털 그릇이 있는 정물'은 크리스털 그릇에 담긴 바나나, 포도, 사과, 오렌지 등의 과일을 평면적이고 단순한 색채의 만화풍으로 그렸다. '금붕어 어항'은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의 '금붕어와 조각상'(1912)에서 이미지를 빌려왔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작품은 거장의 작품을 복제한 것이지만 예술이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것을 꺼렸던 팝 아티스트들은 '복제를 통한 창조'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앤디 워홀의 1962년작‘녹색 코카콜라 병’(사진 왼쪽)과 워홀의 1968년작‘캠벨 수프’시리즈 중 한 점인‘토마토’.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은 원래 구두나 광고 등을 디자인하던 상업 미술가였다. 워홀의 눈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대중 음료인 코카콜라 병의 곡선, 미국 대부분의 가정에서 사먹었던 인스턴트 통조림 수프인 '캠벨 수프' 로고 등이 모두 아름답게 보였다. 워홀은 코카콜라·캠벨 수프 등을 실크스크린 인쇄를 통해 사진 같은 이미지로 재현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워홀의 '녹색 코카콜라 병'(1962) '캠벨 수프' 연작(1968) 등은 대량생산의 산물인 일상의 소비품도 얼마든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발상의 전환이 낳은 결과다. 전시에서는 워홀의 초기작인 '나비 넥타이'(1960)를 비롯해 세제 상자를 재현한 '브릴로 박스'(1964년경), 사과 주스 상자를 재현한 '모트 박스'(1964) 등도 볼 수 있다. '캠벨 수프' 연작의 경우 토마토, 치킨 국수, 야채와 보리가 들어간 쇠고기, 검정콩, 완두콩, 버섯크림, 쇠고기 육수로 만든 양파 등 모두 10종이 선보인다.

가볍고 경쾌한 팝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물질적 풍요가 넘쳐났던 1960~1970년대 '미국 소비사회'를 보여준다면 전시에 나온 20세기 초반 미국 예술가들의 작품은 산업화가 한창인 도시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담아냈다. 에드워드 호퍼(Hopper·1882~1967)의 유화 '해질녘의 철로'(1929)는 노을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근대의 산물인 관제실과 전봇대, 철길을 우수 어린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존 슬론(Sloan·1871~1951)의 '그리니치 빌리지의 뒷골목'(1914)은 빨래가 한가득 널린 마당에서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검은 고양이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가는 뉴욕 예술가 거주지의 겨울 풍경을 다정하게 그려냈다.

전시에는 이 밖에 조지아 오키프·클래스 올덴버그·재스퍼 존스 등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47명의 작품 87점이 나온다.

'이것이 미국미술이다', 9월 25일까지 서울 덕수궁미술관, (02)755-2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