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를 성찰하는 출발점."(최장집) "정치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답변."(유시민)
둘 다 100년 전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Weber·1864~1920)를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국내 진보 진영에서 그가 으뜸가는 '정치 교사'로 떠올랐다. 최장집·유시민·조국 등 진보 진영 학자·정치인·논객들이 잇달아 펴낸 저서의 공통 화두(話頭)는 베버다. 이 책들은 베버에 관한 본격 연구서라고는 할 수 없다. 최 교수는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번역한 '소명(직업)으로서의 정치' 앞부분에 '강의' 형식으로 베버의 생애와 사상의 주요 개념을 해설하고 있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조국 서울대 교수도 신간에서 베버의 주요 개념을 인용하고 있다. 왜 지금 베버인가? 학문적 각성 혹은 심화인가, 아니면 내년 대선을 앞둔 집권 의지의 반영인가?
◆주목받는 베버의 국가론과 책임윤리
진보 진영은 베버의 국가, 정당, 정치인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최근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존 로크에 이르는 12명 학자에 대한 정치철학 연속 강의 첫 권이다. 그는 "민주화 이후 한국의 사회구조는 다원화 되고, 경제 역시 세계 경제의 선진국으로 부상하면서 크게 변했다"며 "그러나 정치 이념은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고, 정치에 대한 이해는 부정적·경직적이어서 민주주의의 가치와 작동 원리에 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베버를 통해 국가의 작동 방식과 운영 원리를 이해하는 한편, 리더십 생산·검증 기제로서 정당(政黨)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요약하면 "한국 정치권, 특히 진보 진영이 배울 것이 많다"는 얘기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도 신간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베버가 말한 정치인의 자질과 윤리를 부각시켰다. 그는 "진보주의는 신념윤리(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고 그 결과는 신에게 맡기는 태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서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행동의 예견할 수 있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태도)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야권 연합의 필요성도 이런 책임윤리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조국 서울대 교수도 베버의 정치가론을 인용했다. 그는 대담집 '진보집권 플랜'에서 진보 진영을 향해 "권력 혐오증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했다. 그는 "정치인은 악마적 힘과 손잡는 사람"이라는 베버의 말에 기대어 "정치권력은 악마의 힘이지만 그 힘을 정확히 사용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진보·개혁 진영은 권력을 유능하게 행사하는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며 "베버를 한 번 더 빌려 말하면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는 대중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꾼들의 지배를 낳는다"고 썼다.
◆학문적 각성? 집권 의지 반영?
진보 진영의 베버 학습열은 여러 갈래로 풀이된다. 우선 뒤늦은 학문적 각성 혹은 현실 경험에 대한 반성이란 해석이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마르크스가 현실 대안으로서 실효를 잃은 상황에서 근대 사회와 정치에 통찰력을 보인 베버가 진보 진영에는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강 교수는 "민주화 이후 현실 정치를 경험해 보니까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 것"이라며 "과거엔 다분히 이념적이고 이상주의적 접근이었지만 이제 현실주의가 강화된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권력 의지, 혹은 현실 개혁 의지의 '구체적 방법론'으로 볼 수도 있다. 유시민과 조국의 책은 '진보집권'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도 "진보 진영의 경우 비판이나 운동 세력의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소수 세력으로서 집권했을 때 어떻게 국가를 운영하고 개혁을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진보 세력에 충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상인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그전까지 계급중심적 사고에 따르면 국가는 쇠퇴하고 마는 것인데, 이제는 국가권력을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이는 과거 10년간 국정 운영의 경험에서 온 실망일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학계에서는 보수-진보의 정치적 입장과는 상관없이 베버 이론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국내 민주주의 논의의 지평이 넓어졌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 베버는 누구… '민주주의도 결국 정치 엘리트에 의한 통치' 주장
베버와 마르크스’(칼 뢰비트) 등의 책 제목에서 보듯, 두 사상가는 학계에서 흔히 맞수로 비교되곤 했다. 계급혁명론을 정점으로 하는 마르크스 저작이 좌파 진영의 교과서 노릇을 할 무렵,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저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이 책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개신교의 예정설 신앙에서 싹텄다는 명제를 제시해 마르크스의 유물론 사관에 제동을 걸었다. ‘신의 선택 여부는 현세에서 경제적 성공으로 알 수 있다’는 믿음이 부의 축적을 낳았다는 해석이었다. 최근 국내에서 다시 주목받는 것은 그가 말년에 행한 강연 ‘직업으로서의 정치’이다. 여기서는 20세기 초 유럽 정치 현실을 배경으로 정치의 엄혹한 현실주의적 특성, 근대국가의 폭력성, 지도자 덕목으로서의 ‘책임윤리’ 등을 논한다. 베버는 민주주의도 궁극적으로 정치 엘리트에 의한 통치이며 인민은 엘리트를 선출하는 수동적 역할 이상을 갖지 못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