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만 주변지역은 한국사와 관계가 깊은 곳이다. 한때 고구려의 무대이기도 했던 이곳은 그 후 한민족의 강역(疆域)이 한반도로 좁아지면서 북방 유목민족과 중국의 역사공간으로 변해갔다. 압록강변의 위화도는 이성계가 요동정벌군의 말머리를 돌려 조선을 건국하는 출발점이 된 곳이며, 여순(旅順)감옥은 한국과 중국의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맞서 싸우다 억울하게 희생된 곳이다.
◆여순감옥
대련에서 요동반도 끝자락으로 자동차를 30~40분 달리면 여순에 도착한다. 여순항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러일전쟁(1904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여순에서 장춘(長春)으로 이어지는 700여㎞에 달하는 철도 관리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만주 침략에 나서게 된다. 만철 조사부는 동북 3성의 지하자원을 샅샅이 조사하여 석탄, 철광석 등을 일본으로 실어날라 전쟁을 준비했다. 1930년대 일본의 귀족과 유학생들은 대련에서 당시 세계 최고의 속도(최고시속 130㎞)와 시설을 자랑하던 만철(滿鐵·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약칭) '아시아'호와 시베리아 열차를 번갈아 타고 유럽까지 여행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재무상을 만나기 위해 온 이토 히로부미를 정확히 저격해 응징했다.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된 안 의사는 일경에 넘겨져 여순감옥에 수감된다. 러시아가 먼저 지은 것을 일본이 확장한 여순감옥은 1906~1936년 사이 한국·중국·러시아인 2만여명을 수감하였고 악랄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감옥 안에 사형장을 두고 수백명을 처형했다. 일제는 안 의사에 대한 재판을 오래 끌 경우 한국인들이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이듬해 3월 26일 서둘러 사형시킨다.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악을 당당히 밝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안 의사는 일제에 의해 비밀리에 여순감옥 부근에 묻혔으나, 한국 정부는 아직도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해 "광복 후 고국으로 반장해달라"던 안 의사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여순감옥에는 안 의사가 수감된 감방과 교수형을 당한 형장이 보존돼 있다. 그 후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申采浩) 선생과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였던 이회영(李會榮) 선생도 이곳에서 일경의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다. 감옥 안에는 한국광복회의 후원으로 조성된 기념관이 있다.
◆위화도
압록강 철교 북쪽으로 위화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말 장수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왔다가 회군한 곳이다. 당시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해 철령 이북의 땅을 관할하려 하자, 고려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이 요동정벌을 명하였고 10만 대군을 거느린 이성계와 조민수는 압록강서 큰 비를 만나 건너기 어렵게 되자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며, 여름철 무덥고 비가 많이 와 활의 아교가 녹는다'는 이른바 '4대 불가론'을 들어 회군(1388년)하였다.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최영의 군대를 격파하고 우왕을 폐위한 뒤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서울대 금장태 교수는 저서 '산해관에서 중국 역사와 사상을 보다'에서 "창을 밖으로 겨누고 뻗어나갈 것인가, 거꾸로 잡고 안으로 권력투쟁에 뛰어들 것인가의 일대 갈림길이 저 위화도였다"며 "밖으로는 무기력하면서도 안으로는 백성들에게 혹독하였던 역사의 그늘이 지금도 길게 드리워 있다"고 평가했다. 위화도 회군은 당시 고려 지배층 내부에 중국(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에 대한 갈등의 표출이기도 했다. 이는 21세기인 현재 다시 부상한 중국과 미국, 혹은 독자적인 길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 단동에서 바라본 위화도는 지난해 여름 압록강의 홍수로 큰 피해를 본 뒤 제대로 복구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봉황산
단동에서 심양 방향으로 55㎞쯤 떨어진 곳에 '봉성(鳳城)'이란 지명이 있다. 봉황산(높이 837m)에서 유래한 이곳은 고려와 조선시대 사신들이 지나던 곳이다. 봉황산은 원래 이름이 '곰산'이었는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이 산에 올랐을 때 봉황이 나와 절을 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봉황산에는 옛 국경방어선인 목책이 있었다.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의 사신 일행은 이 문을 통과하면서 인원점검을 받았다. 요샛말로 입국심사를 받은 것이다. '봉성'은 국경을 통과한 조선의 사신들이 머물던 국경도시로, 조선 음식점이 번성하던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