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범 감독은 "영화를 찍으면서 죽은 친구 승철이 생각 때문에 많이 울었다"고 털어놨다.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무산일기

8000만원의 제작비로 만든 작은 영화 한 편이 잔잔한 화제다. 박정범 감독의 장편 데뷔작 '무산일기'(14일 개봉)다. 박 감독은 연출, 주연, 시나리오 등 1인3역을 했다. 스태프 6명으로 시작한 대학원(동국대 영상대학원) 졸업 작품인데, 국내외에서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는 내세울 게 별로 없다. 스타도, 화려한 볼거리도 없다. 내용마저 무겁다. 탈북 청년이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보고나면 마음이 묵직해진다.

그런데 국내외 영화제를 휩쓸고 있다. 모로코의 미라케쉬국제영화제, 홍상수와 박찬옥 감독이 수상했던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대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 프랑스 도빌아시안영화제 심사위원상 등이다. 4월에도 홍콩국제영화제 인디파워 부문 등 7개 영화제에서 초청받았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와 비교된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면서 "영화가 오늘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관객에게 묻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박 감독은 겸손하게 말했다. "탈북자라는 소재 때문에 과대평가된 게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특이한 소재로 주목받는 것을 경계했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거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담을 생각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무산일기'는 소재 자체보다 견고한 내러티브와 감독의 뚝심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박 감독이 말한 것처럼 이 영화에 '구호'는 없다. "견디고, 견디고, 견디다가 병에 걸려 죽은 탈북 청년의 고통스러운 삶"만이 오롯이 들어있다. 그게 실화라는 점이 아프다. 그 점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높여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2003년부터 써온 시나리오 4개와 단편을 합쳐서 만들었다.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속으로 오래 삭여왔다는 뜻이다.

박 감독은 대학 시절 탈북자 청년(전승철)과 3년 동안 같이 살았다. 그가 암으로 사망하면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만들었다. 처음에는 '125전승철'이라는 단편이었다. 싸이월드에 쪽지로 남긴 "형이 만든 영화를 못보고 가서 억울하다. 영화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켜달라"는 유언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125는 탈북자들에게 주는 주민등록번호다. 박 감독은 "승철이가 살아 있으면 못 만들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영화는 고통스럽게 살다 죽은 친구에 대한 헌사인 셈이다. 이창동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고 격려한 것도 큰 힘이 됐다.

'무산일기'는 매우 사실적이다. 주인공 승철의 밑바닥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철거촌 임대아파트에 끼어 살고, 벽보를 붙이거나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해서 입에 풀친한다. 탈북자가 탈북자를 상대로 사기 치고, 그들끼리 싸우거나 추격전을 벌이다. 교회에 가서 여성을 짝사랑하는 장면도 나온다. 박 감독은 "전부 보고 겪은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 감독은 "탈북자 영화가 아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영화 속 승철은 '125'만 떼면 일, 직업, 학력 등 모든 면에서 우리 사회 극빈자들과 똑같다. '무산일기'는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그린 영화라는 것이다. 박 감독은 "그들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탈북자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지 못했다. 박 감독은 "그들이 많이 슬퍼할 것 같다. 매 맞을 각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상영되면 체제 홍보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밝게 살아가는 탈북자도 많은데 어두운 얘기만을 했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그러나 "승철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진정성을 표현했다.

지금이야 리얼리즘 영화의 기대주로 주목받지만, 원래는 영화와 거리가 멀었다. 영화라고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그중에서도 스티븐 스필버그 작품만 있는 줄 알았다. 대학도 체육교육과(연세대)를 다녔다. 군대 시절 기타노 타케시 감독의 '하나비'를 보고 영화에 관심을 가졌고,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을 며칠 동안 계속 보면서 소름 끼치는 경험을 했다. 이후 영화에 완전히 몰입했다.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탔어도 여전히 빚이 남아 있다. 박 감독은 "상금이 다 입금되면 남은 2800만원을 갚을 수 있다"고 웃었다. "관객이 1만명만 들어서 다음 영화 제작비를 뽑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 감독은 올 겨울에 '산다'라는 영화를 찍을 예정이다. 강원도 청년이 서울에 와서 겪는 일들을 그린 영화다. 자살한 친구의 삶이 모티프가 됐다. 이 영화까지만 배우로 출연할 생각이다. 임정식 기자 dad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