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것들의 아주 특별한 역사
베탄 패트릭·존 톰슨 지음|이루리 옮김 | 써네스트|560쪽|5만2000원
인간이 몸의 털을 다듬기 시작한 것은 대략 3만년 전이었다. 이른바 '면도의 탄생'이다. 그때는 '칼' 대신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간 조가비나 상어 이빨 따위를 썼다. 그 뒤로 수염은 유행에 따라 출현과 퇴장을 반복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매끈한 얼굴이 귀한 신분의 상징이었다. 명문가의 무덤에는 청동 면도기가 함께 묻혔다. 기원전 6세기 로마 병사도 규칙적으로 면도를 했다. 여인들도 체모를 밀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편리한 1회용 면도기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 가난한 외판원이었던 미국의 킹 캠프 질레트는 어느 날 친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겠나?" 친구는 왕관 모양 병뚜껑을 발명한 윌리엄 페인터였다. "한번 쓰고 버릴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보게." 친구의 대답에 질레트는 면도기를 떠올렸다. 수년간 시행착오 끝에 MIT 교수 도움으로 싸고 얇고, 한번 쓰고 버릴 수 있는 철 소재 면도날 제작에 성공했다. 1903년이었다.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 참전병들에게 인기였고 미 정부와 군납계약까지 맺었다.
미국의 비영리 지리·과학 교육기관으로 유명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나온 이 책에는 이처럼 '평범해 보이는 것들의 비범한 역사들'이 빼곡하다. 작고 납작한 원반 위에 구멍이 난 단추의 유래부터 기도문 끝에 외는 아멘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익숙해 보이는 주변의 물건과 관례, 풍습들이 어떻게 지금 모습대로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풀어 보인다. ▲음식과 음료 ▲계절과 축제일 ▲예법과 관습 ▲상징과 표시 ▲주거 공간과 생활 공간 ▲의류와 액세서리 ▲약물과 의약품 ▲장난감과 게임 ▲도구와 혁신 등 9개 주제에 따라 소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일상 소품이 달리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인들이 치약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부석 가루와 식초를 이용해 치아 세척제로 사용했다. 로마인들은 식초 대신 소변을 사용했다. 암모니아에는 치아를 깨끗하게 하는 기능이 있었다. 일부 부자들은 오줌 농도가 짙다고 소문난 포르투갈인들 것을 수입해서 '치약'으로 사용했다.
상식을 뒤집는 내용도 있다. '케첩'이라면 토마토부터 떠올리지만 어원을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그 이름은 맛이 진한 생선 발효소스인 중국의 키첩(ki-tsiap)에서 유래했다. 당시 중국에 온 네덜란드와 영국 선원들이 짠맛을 내는 독특한 발효소스에 매료돼 유럽으로 돌아가 퍼뜨렸다. 유럽에서는 케첩을 호두, 샐러리, 버섯 같은 토산 작물을 써서 만들었다. 정작 토마토케첩이 탄생한 것은 신대륙에서였다. 서기 700년경 아즈텍인들이 처음 재배한 토마토는 당시 유럽인들에 의해 북미에 퍼져 있는 흔한 식재료였다.
책은 쉽게 풀어쓴 생활문명사 같기도 하고, 수백 장의 컬러사진과 일목요연한 연표를 곁들인 잡학사전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세상에 나온 유사한 책들과 겹치는 부분도 눈에 띈다. 샌드위치나 핫도그의 유래는 이제는 널리 알려져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항목의 편중성도 한계다. 체스나 포커에 대한 설명은 길지만 장기, 바둑 이야기는 없다. 의류, 명절, 풍습들도 서양에 치우쳐 있다. 아쉬운 대목이다.